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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두리 호와의 인연기

2. 두리 호 안으로(승선)

by 전희태
두리호승선 014.jpg 굴뚝의 칠도 살콤 벗겨져 가는 두리의 모습


훤넬(굴뚝)의 채색도 옛 선주가 칠해준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낯설어 보이는 두리호는 어둠 속 자신의 보급자리에 몰래 숨어 들은 커다란 들짐승 마냥 어두컴컴한 부두에 웅크린 모습으로 접안 해 있다.


여기서 작업이 끝나면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안에 싱가포르를 거쳐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까지 가서 그 생애를 마감할 배라는 선입견이 반 이상의 화물(철광석)을 이미 베이룬에서 하역해주고 찾아와 그만큼 높아진 덩그러니 떠 오른 모습 되어 더욱 안쓰럽게 보이는 모양이다.


추우니 차 안에 있으라는 대리 점원의 말을 고맙게 생각하며 좌석에 앉아 기다리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 차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눈을 뜨니 출입국관리소에 다시 가야 한다며 서두른다. 아직 까지 배에 올라갈 수는 없는 이방인(?) 신세인 것이다.


양자강의 하구 가까운 상하이보다 좀 더 강 상류 쪽에 위치한 난통의 밤거리 도로는 어둠과 어울린 속에서 울퉁불퉁 튀어 오르는 동요가 심해서 싫었지만 그나마 길 폭이 넓은 게 차들 간의 안전 간격은 넓어 보였다.


마구잡이로 달리는 거친 매너의 운전자와 차의 허름한 모습에 불안한 마음도 들지만 그냥 말없이 참아주며 찾아간 이민국 건물은 철저한 보안을 가진 정문 초소와 잠가 놓은 문으로 우리를 일단정지시켰다가 맞이 해준다.


열어준 정문을 지나 마당을 건너 본관 건물로 들어서니 사무실 안에 당직자로 근무하는 20대 초반의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나타난다.


늦게 방문한 사람을 경계함인지 갑자기 비상경계 음이 발령되며 시끄럽지만, 그녀도 대리 점원도 모두 무시하고 제할 일로 들어서는 태도라 나도 모르는 척 귀를 닫아 주고 뒤를 따라 들어섰다.


요란한 소리가 제풀에 잦아들 무렵, 받아 든 여권과 선원수첩을 뒤적이며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챙기는 그 녀를 창 너머 대기 석에서 건너다본다.


잠깐이지만 곤한 잠이 들었던 몸이라 그런지 다시금 느껴지는 한기에 감기를 걱정하며 몸을 부산하게 움직여 헛체조를 시작한다.

그러고도 한참이 더 지나 추위에 지쳐들 무렵 서류심사가 끝났는지 만들어 놓은 상륙증에 스탬프를 팍팍 찍더니 대리 점원에게 건네준다.

이제 배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한 길로 다시 나서서 부두를 향한다. 아까 되돌아왔던 길을 되짚어가기 위해 급한 달리기가 또 시작되었다.


저 멀리 인도양에 있는 방글라데시까지 자신의 종착지로 인도해주려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나를 품어 주기 위해 두리는 점잖게 후부 쪽으로 있는 현문 사다리를 내려서 부두에 걸쳐놓은 채 기다리고 있다.


가파른 셈을 헤아리는 스텝을 밟아 위로 오르며, 하나 둘 속으로 세어내는 셈의 끝은 마흔다섯(45) 계단이다.

지난번 탔던 배는 쉰셋인가 되는 계단이었다. 이렇게 일고여덟 계단의 짧은 차이는 공선 상태에서 출입하려 할 때면 그만큼 높아지는 형편이 될 것이니 제법 애를 먹을 수도 있겠다고 떠오르는 생각은 그냥 무시하기로 한다.


이 현문 사다리를 사용할 날도 기껏해야 서너 번 밖에 안 남았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 는 식의 얄팍한 계산이 뒤따라 떠올랐기 때문이다.


3월 27일의 밤. 나는 두리의 현문 사다리를 올라 승선하며 이렇듯 인연의 끈을 꼭꼭 묶어 내기 시작했다.

두리호승선 022.jpg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에 밤새워 양하작업을 하고 있는 두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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