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두리 호를 찾아가는 길
이 이야기는 2009년 4월 한 달 간에 걸쳐서 제가 겪었던 좀 특별한 승선 일기입니다.
명퇴란 정년퇴직으로 반평생의 승선 생활이 끝난 지도 어언 7년이 지나고 있던 때로서, 고철로 팔려가는 선박을 그 폐선 해체장까지 곱게 모셔다 주는 마지막 항해를 맡게 된 것으로 배를 타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좀 독특하고 특별한 일이었기에 경험을 위해 흔쾌히 승선을 받아들인 셈이 되었다.
사실 내 승선 세월의 대부분은 소속 회사의 사선을 교대해가며 연가 때까지 근무한 것으로, 그중에는 조선소에 신조 발주시킨 새로 만든 배도 있었고, 때로는 회사가 해운시장에서 구입 한 중고선박의 인수를 위해 그 선박에 승선 중인 외국 선원으로부터 교대하여 본선을 건네받은 일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이번 같이 특정 선박의 마지막 항해에 동행하여 선박 해체장까지 가려는 일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그야말로 쓸모 있는 최후까지 사용한 낡은 선박을 또다시 고철과 기타 필요한 부품별로 해체하려는 폐선장까지 무사히 데려 다 주는 것으로 나의 일은 끝나겠지만 그 배 입장으로 본다면,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신세 같은, 선박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하러고 가는 좀은 비감 한 예정을 이끌어 동행해주는 최후 항해인 것이다.
두리 호는 그렇게 야릇한 인연으로 나와 만나게 될 나이 많은 CAPESIZE BULK CARRIER로서 앞으로 밤낮 없는 한 달 여의 기간을 같이 보낸 후,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선박 해체 장인 해안가에다 강제로 승양(Aground)시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주면서 영원한 작별을 실감하게 될 배인 것이다.
1. 두리 곁으로
배를 탄다는 예정은 늘 그렇다. 게다가 생을 마감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같은 신세가 된 배를 두고 벌어진 출국일자는 너무나 어수선하였다.
이번에도 승선 일자는 회사와 미팅을 가진 그날부터 당겨진 고무줄 같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속성을 남김없이 보여주며 출국 일을 밀고 당기다가, 어느새 내일 오전에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야 할 예정까지로 바짝 당겨졌기에 저녁때 아내와 아이들이 착잡한 심정인 아버지의 장도를 축하해준다는 명목으로 열어 준 급조의 조촐한 가족 파티는 결국 잠이 모자라는 밤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그래도 아침 일찍 일어났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푸석함을 달래 가며 떠날 준비를 할 때 아내는 모처럼의 일요일도 없이 먼 길 떠나는 남편을 위해 공항까지 같이 따라나서겠다는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다.
기어이 따라나섰지만 나이가 있는 피곤함은 어쩔 수 없는지,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잠깐씩 곤한 쪽 잠에 빠져 들곤 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을 잠시 이번에 인연을 맺게 된 배를 자세히 살펴보는 기회로 삼았다.
국적선으로 DURI라는 영문 명을 가진 이 배는 얼마 전까지의 해운 경기가 좋았을 때, 모 선사에서 사들였던 중고선으로서 그간에는 제법 돈도 벌어주었지만 해운경기가 바닥을 뒤져갈 무렵이 되면서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선주가 파산하면서 우리 회사로 들어오게 된 배다.
1981년 일본 히타치 조선소에서 신조로 태어난 CAPE SIZE 선박으로 이미 28세라는 나이는 배로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노령의 배이기에 요즘 같은 해운 시황에선 얼른 폐선 처리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 일이 될 수 있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었고, 이제 그 최후의 현장으로 에스코트해주는 역할을 내가 맡기 위해 집을 나서게 된 것이다.
현재 승선 중인 선장이 그 일까지 마무리 짓고 떠나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되지만 타고 있던 동안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도저히 그 일까진 못하겠노라 고사하였다는 회사 직원의 표현을 전해 들으며, 교대에 나서 주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그가 당했을 형편을 동료 뱃사람으로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었기에 회사의 제의에 그대로 응하기로 하였고 이제 그 당사자들을 만나러 중국으로 가는 길이다.
그 배는 지금 자신의 생애 마지막으로 지워진 철광석을 선적하고 중국에 기항하여 마지막 봉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새 리무진 버스는 공항에 도착하였다. 같이 떠나기로 된 3 기사를 만나려고 출국 수속을 미루고 기다렸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궁금증에 그의 휴대폰에 전화를 건다. 받는 사람이 가족이라며 3 기사가 집을 나설 때 전화기를 집에 두고 갔단다.
얼핏 무슨 대꾸를 해야지? 잠깐 궁리에 말이 끊겼다가, 그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오면 같이 가게 된 선장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라며 알려주도록 청하며 전화를 끊는다.
젊은 사람이 너무 덤비다가 휴대폰을 집에 두고 떠난 건가? 어찌 그리 칠칠치 못한가? 하는 생각도 하였지만 그런 게 아니지 필시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리 되었겠지 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며 기다리기를 계속한다.
어쨌거나 아내가 같이 있는 시간이었기에 지루하거나 걱정되는 일이 없으므로 편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30분쯤 지나니 전화벨이 울린다. 3 기사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는 집이 부산 쪽이라 김해공항에서 떠나 오는 중이었다. 랑데부할 약속 부스를 다시 알려 주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에서 첫눈길이지만 서로를 알아본다. 그것은 뱃사람들의 직감력이기도 하다.
공손히 인사하는 3 기사와 그대로 창구로 가서 티켓팅을 끝냈다. 이번에는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해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버스 길을 배웅해주려고 일층의 공항버스 정거장으로 내려갔다.
5분여쯤 기다렸을 때 우리 동네 쪽으로 가는 버스가 들어온다. 간단히 이별의 인사를 나눈다. 잠깐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 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 후 나도 떠나기 위해 출국장을 향해 다시 3층으로 올라간다.
기내로 들고 들어갈 짐도 다 체크한 후 출국장으로 들어서니 우리를 태우고 상하이 푸동 공항을 향할 아시아나의 에어버스기가 42번 게이트와 연결된 램프에 동체를 대고 쉬고 있는 모습이 저 아래에서 보이고 있다.
마침 대기실의 텔레비전에서는 김연아 양이 세계 피겨선수권 대회에서 역대 여자 싱글 사상 최초로 200점을 돌파하면서 첫 우승을 차지한 경기를 중계방송하고 있다.
기쁜 소식이 별로 없는 요즘 그녀의 이런 쾌거가 아무쪼록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에 갈증을 시원히 해소시키는 일로 다가옴을 반기며 비행기 타는 시작을 알리는 방송을 따른다.
좌석의 반도 채우지 못한 것 같은 승객들의 입실 모습이다. 우리야 넓어진 공간을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지만, 항공회사는 이렇게 해서 채산이 맞는 걸까?
한산한 기내를 둘러보며 지켜보는 심정 속에 혹시 항공사도? 하는 걱정이 든다. 그들도 우리네와 같이 운송을 업으로 살아가는 회사가 아닌가?
기수를 하늘로 치켜떠 오르는 인천공항의 공간에는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가 가득 찬 느낌이라 좋았는데 상하이에 도착하여 숙여지는 기수 아래에는 뿌연 스모그성 안개가 피어 있다.
누군가 마중 나와서 기다려 줄 사람이 있을 거로 당연히 기대하며 짐을 찾은 후 밖으로 나왔으나 수많은 플래카드와 쪽지를 들고 있는 사람들 중에 내 눈에 뜨이는 사람이 없다.
3 기사를 다시 돌려세워 찾아보도록 한 후 손수레를 지키며 한참을 기다렸더니 이미 승객이나 마중인이 거의 다 빠져나간 틈새에서 어떤 사람이 다가오는데 그 손에 들린 푯말-그냥 종이에 적은-을 보니 바로 내 영문 이름이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알은척하자, 그가 한 단 한마디 말은 투 맨?이다. 두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왜 혼자냐는 뜻인 모양이다.
삼 기사가 그를 찾으러 떠나서 옆에 없었기에 의아해하며 묻는 말이기에 잠시 기다리자고 하는데 때맞추듯3 기사가 나타난다.
안내인을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요리조리로 잘도 빠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도 옆에 서서 그가 가지고 오는 차를 기다렸다.
이제 비행기 타고 온 시간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서 난통(南通)까지 승용차로 달려야 하는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후진시킨 현지 시간으로 1315시경에 푸동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안내인을 만나느라 보낸 시간만큼 빼어주고 나서도, 두 시간 이상이 더 지난 16시가 가까워서야 난통의 대리점 앞에 도착하였다.
대여섯 군데의 톨게이트를 거치며 고속도로와 수통대교를 포함한 두 개의 커다란 다리를 계속 시속 80킬로미터 이상이 되는 속력으로 달리는 운전 속에서도 그 친구는 코를 후비어 코딱지를 차창 밖으로 내어 버리는 동작 등 이런저런 손장난을 하고 있어 조마조마한 마음을 금치 못하게 했다.
마중해주는 대리 점원이 아직 배가 부두에 대질 못해서 저녁 8시경이 되어야 접안이 끝날 거라며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내어주는 곳은 의자 여섯 개 만을 횡 하니 거느린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이 지키고 있는 대리점 사무실의 3층 빈 방이다.
집을 떠나면서 돌아갈 때는 더위가 생길 무렵이라 생각하고 여름옷으로만 치장하고 온 형편이라 날이 저물어 가면서 살갗을 파고드는 싸늘한 한기로 인해 코가 찡해지는 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온풍기라도 돌려 추위를 막게 해달라니 벽의 스위치 박스를 조작하여 천장에서 바람이 흘러나오게 해주는데 글쎄 그 바람이 더운 게 아니라 찬 바람이라 더욱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이제 어둠까지 찾아오니 꾸르륵 거리며 뱃가죽이 아우성치며 다가선다. 대리 점원에게 저녁 식사하러 가자고 조금 강하게 청을 넣었다. 잠시 후 그가 앞장서서 인도를 해준다.
기대를 하며 쫓아 들어간 곳이건만 그야말로 실비로 봉사하는 음식점임에 틀림없다. 꾀죄죄한 탁자며 고물에 가까운 그릇이며 게다가 한 번씩 껌벅거리다 꺼지는 형광등 불빛, 모두가 한 목소리로 나의 기대를 꺾어주고 있다.
허름한 노동자 풍의 여러 세대 여러 계층이 섞이어 함께 한 사내들이 군데군데 둘러앉아 먹는 음식은 제 각각의 음식이었고 어떤 이는 현지 맥주까지 곁들여 저녁 식사를 겸해 반주를 하는 모습도 들어 있다.
조잡한 메뉴 판은 볼펜으로 쓰여있는 음식명과 가격이 나열된 너절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그걸 보며 전통과 역사를 억지로라도 찾아보면서 시킬 수 있었던 음식은 채소와 두부라는 한자가 들어 있는 볶은 음식이었다.
막상 식사가 나오고 보니 12시경 기내식으로 간단한 요기를 했던 뱃속은 밥을 더 청해 먹을 만큼 체면을 슬며시 벗어나 준다.
처음 먹어 보는 맛으로 배와 시간을 채우며 식사를 끝내고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 이어가고 있는 중국인들의 단체적으로 하는 거리 체조 모습을 창밖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대리점 빌딩 앞의 주차장을 겸한 공간에서 서로 마주 선 무리를 이루어 단독으로 추는 똑같은 춤 동작 같은 체조를 하고 있었다.
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참 싫증도 없이 잘하누나 싶었는데 결국 그들의 끝나는 모습도 보지 못한 채 내가 먼저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대리 점원이 그들 사이를 헤치면서 빼어낸 차에 올라서 그곳을 떠나 부두로 향한 것이다.
이제 배가 부두에 들어왔단다. 시간이 19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두리는 1980년 5월 18일 일본 ARIAKE의 히타치 조선소에서 YARD NUMBER 4.642로
KEEL LAID 하며 태어났고 그 해 10월 5일 물 위에 띠워진 후, 마지막 의장 작업 및 선박
으로서의 단장을 마무리하며 1981년 1월 29일 선주에게 인계되어 M/V WORLD DULCE
라는 첫 이름을 가진 CAPESIZE 의 BULK 선으로서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화려한 생애
를 시작한 것이다.
몸무게 (Ldt-METRIC TONS) :20,026 -그야말로 만들 때 순 철판 무게라고 해야 할까?
총톤수/순톤수 :74,672/42,003
총길이 (LOA) :270.88 m
선폭(BREATH) :43.8 m
최대 깊이(DEPTH) : 23.8m
선창/개구부(HOLDS/HATCHES) : 9/9
DWT : 138,350 MT
IMO NO.7925948
선명의 이력
M/V WORL DULCE (PANAMA)
M/V DALTON (U.K)
M/V NAVALIS (HONG KONG, CHINA)
M/V CAPE OF GOOD HOPE (MALTA)
M/V GREAT GALAXY (PANAMA, KOREA)
M/V DULI (KOREA)
라는 이름으로 개명해가며 여러 나라의 선주와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지만, 그런 그녀의 생애에서 변하지 않은 단 한 가지는 7925948이란 IMO NO.(번호)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로 치면 주민등록 번호인 이 중요한 인식번호는 관련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때 배 이름에 앞서 쳐도 이력이 줄줄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