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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두리 호와 인연기

7. 싱가포르 도착 전

by 전희태
CEƮ0271.jpg 싱가포르에서 양륙하려고 준비한 페인트 캔들.


대만 동쪽 연안을 따라 언제나 힘차게 올라오고 있는 조류인 흑조(黑潮)의 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보려고 (역조를 피해 보려고) 잡은 침로를 따르다 보니 너무 육지와 떨어져 대만의 섬 그림자도 못 본 채 남행하는 항해가 되고 있다.


그렇게 겨울철에는 악명 높은 황천의 바다를 품고 있는 바시 찬넬, 바리탕 찬넬도 모두 두리뭉실하게 젖혀 가며 통과하다 보니, 바람도 자신의 힘 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우리 배, 두리호의 주기 운전을 살갑게 돌봐 주는 모양이다. 10노트의 속력이 계속 유지된 채 달릴 수 있도록 뒷바람으로 항해를 도와주고 있다.


회사와 연락을 가지어 싱가포르에 기항했을 때, 본선에 재고로 많이 쌓여있는 페인트와 수리용 파이프 등 철제 류를 하륙한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다.

이들을 그냥 싣고 폐선장으로 간다면 그야말로 고철 값도 못 받고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선용품 관리가 되는 셈이니, 앞으로 이곳에 기항하는 사선에게 넘겨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여 하륙시키기로 한 것이다.


한참 때의 배 값에 대면 말도 안 되는 푼돈 수준의 고철로 매선 하는 것도 억울한 사정인데, 이들 선용품 마저 그대로 함께 넘긴다면 그 역시 손실에 보탬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당시 그 물건들을 실어주기 위해 들였던 공력이나 금액을 생각해도 사실 너무 아까운 일이다. 따라서 수속이 가능한 항구에 기항하여 합법적으로 하륙시켜 그런 물건이 필요한 자매선에 보급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이런 이유와 함께 마지막 순간 바이어에게 본선을 인도할 때 참여해야 할 최소의 인원만 남긴, 잉여의 인원이 되는 선원들도 전부 하선 조치하려고 싱가포르에 기항하는 것이다.


이미 그런 상황을 본선 승선 때 교육받고 찾아온 몸이긴 하지만, 일부 선원을 하선시킨 후 남은 선원으로 싱가포르 해협과 말락카 해협을 통항할 때 출몰하는 해적 방지를 위한 당직을 설 생각을 하니 피곤에 절은 하품만이 연상되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서 하선하는 선원들이, 지금 양륙 할 물건들의 하륙 작업도 돌보지 않고, 그냥 하선해 버릴 경우 남아 있는 선원들로만 작업하는 것 역시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일의 해결을 위해 회사에 연락하여 하선 선원들이 본선에서의 작업을 모두 끝마치고 내리도록 조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로 한다.


이런 상황을 전해 듣는 싱가포르에서 하선하지 못하고 종착지인 치타공까지 가는 팀으로 결정되어 있던 한국 선원들의 걱정이 점점 태산 같아지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일련의 일들이 입항을 하루 앞둔 시점에 새롭게 조정되어, 미얀마 선원들의 싱가포르 하선/귀국을 치타공에서 실행하도록 미루기로 최종적으로 결정되어 한국 선원들의 걱정을 덜어주게 되었다.


그간 미얀마 선원들이 하선한 후 남은 선원들에게 지워지는 여러 가지 문제 중 가장 난제인 해적 방지 당직을 염두에 두고 고민에 잠겼던 내 마음도 따라서 편해졌다.


그 대신 전 선원이 함께 가는데 따른 주부식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이곳 싱가포르에서 사흘 분의 주부식을 더 선적해 주도록 청하였다.


최소량을 감안하여 청구하니 너무나 미미한 주부식 주문량이라 선식 회사가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마침 우리 회사의 대리점도 겸하게 있어, 비록 도착하는 오늘이 싱가포르의 휴일이라고 해도 최선을 다해 봉사하겠다는 전언을 깍듯이 전해 오고 있었다.



저녁시간이 되면서 조심스레 살펴가며 항해하고 있는 이곳은 남중국해의 아남바스 제도를 근접으로 지나야 하는 곳인데, 그 섬들이 해적의 소굴이란 소문이 나 있기에 더욱더 정신 바짝 차리고 지나는 해역이기도 하다.


보름 달밤의 휘황한 밝음 속에 치러내는 해적 방지 당직이 달빛을 무색하게 만들지만 그래도 열심히 당직에 임하는 선원들이 브리지 양쪽에서 철저한 경계를 하고 있다.



E9_langanger0311.jpg 싱가포르에 보급품을 수급받으러 온 배들의 정박한 모습.


아침 열 시 도착 시간에 맞추기 위해 속력을 좀 낮추어 가고 있으니 많은 배들이 두리를 추월하여 앞서 나간다.

그래 이제 마지막 남은 시간 싱가포르라도 잘 관찰하며 이 밤을 보내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지 뭐! 하는 듯한 행보를 두리에게 주려는 듯이 천천히 순항하지만 그만큼 해적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지니 조심스럽다.

새벽녘에 도착한 싱가포르 해협 동쪽 입구 부근은 육지의 그림자도 희미한 가운데 수많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는 휘황한 불빛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런 배들의 많은 불빛이 결코 해운경기가 좋아서 만이 아니라, 두리 같은 배들을 만들기 위한 기다림도 포함하고 있다는 현실을 깨달아 보며 착잡한 마음 또한 그 불빛 위로 남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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