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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을 기다리는 무료한 하루 시작

또다시 늦어지는 배의 입항을 기다리며

by 전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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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뭔가 분주하면서도 한가한 RIO GRANDE의 하루가 시작되는 한 불록을 더 가면 강가에 닿아서 길이 끊기는 거리의 풍경


새벽 0시 10분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잠 깊게 들기 시작할 무렵이건만 나는 지금 두 눈에 초롱초롱한 기운이 감도는 상태에 들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리나라는 낮 12시 10분의 한창 깨어서 일할 시간인데 그런 시간에 매어 있다가 갑자기 반대로 뒤바뀐 시간을 살게 되니 아직 시차 적응이 잘 안되고 있는 것이다.


배를 타고 항해하면서 하루나 이틀에 한 시간 정도씩 천천히 전진하거나 후진시키며 시간의 변경에 참여했다면 이렇게 시차의 적응에 힘들지 않았을 건데 비행기로 단 이틀 만에 반대의 계절과 밤낮 반대의 시간을 사는 곳에 덜렁 떨어져 버렸으니 아무래도 주야가 바뀌어 버린 시차에 적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제 새벽 안 그래도 잠 못 이뤄 들 척이던 나에게 창 밖의 도로를 달리면서 온갖 소음을 선사하던 오토바이들의 횡포가 지금 시간에는 많이 줄어 있지만, 대신 비에 젖은 조각돌 포장도로 위를 달리는 승용차들의 타이어가 내는 마찰음들이 귓가를 어수선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좀 전까지도 불어주던 바람에 누렇게 변색되었던 플라타너스 잎새들이 대거 탈락하여 뒹굴고 있다가 지나는 차량의 돌개바람에 휩싸여 뿌연 수은등 불빛 아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춤을 추듯 일렁이는 모습 되어 스산한 한몫을 거들어 주고 있다.


호텔 3층에서 한밤중에 창 밖을 내다보는 눈길 안에 건너다 보이는 길 가운데 중립지역에는 내 눈높이 가까이까지 우뚝 솟구친 가녀린 철제 가로등 전봇대가 서 있는 데, 녀석은 지나는 바람결에도 조금씩 몸체를 유연하게 동조해주며 양팔에 매달은 수은등을 통해 세거리와 차도를 막아 만든 한 거리 작은 광장까지 환하게 비춰주고 있다. 이 빛의 위력 때문에 빤히 마주 보고 있는 이 호텔의 창틀은 모두 다 두꺼운 블라인드 커튼을 치게 된 모양이다.


첫날밤을 이방에서 지나고 아침이 되었을 때, 창문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여는 방법이 모호한 육중해 보이는 블라인드 커튼 때문에 그냥 컴컴한 조명 속에 기죽어 있었다.

낮에 방을 청소해 준 후 활짝 열어 놓아 환하게 밝아진 방안에 들어섰을 때, 블라인드의 독특한 열고 닫음을 터득했고, 너무나 쉽게 방안이 바깥으로 노출되는 이 호텔의 창문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그런 무지막지해 보이는 블라인드가 필연적인 선택이었음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이만큼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의 시간에 동화되어 생활하기 위해서는 다시 침대에 들 수밖에 없다. 창 밖 구경을 포기하고 침대를 파고든다

.

잠에서 다시 깨니 새벽이 허물어져 가는 6시 반이 빠듯하다. 대강 준비하여 옷매무새를 고친 후 일층 식당을 찾아간다. 빵으로 이른 아침을 챙겨 먹었고 한참을 기다려서 과업 시간에 들어선 후 대리점으로 전화를 걸어 본다.


오늘 밤 20시경 접안할 예정이라는 대답이 수월하게 전해져 오지만 어찌 믿음이 안 가는 대답으로 들린다. 그런 예정대로 된다 해도 나의 승선은 내일 오전이라는 이야기가 덧붙여 있다.


오늘내일 미루다가 아직까지 집에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어 걱정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에 전화를 걸어 주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지만 아직까지는 그냥 참아두기로 한다.

낮에 늘 점심을 챙겨 먹는 PLAZA GRILL뷔페식당을 찾아갔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 푸짐하게 먹는 방법도 터득하여 쓸데없이 무게가 많이 나가는 음식은 피하며 수북이 담은 접시를 저울에 올려놓는다. 어제와 비슷한 음식물의 모습이지만 돈은 좀 적게 나온 것 같다.


이 뷔페식당은 모든 음식을 접시에 담은 후 그 무게를 달아 가격을 정하고 리필을 해도 또 무게를 달아 다시 계산하는 방법으로 장사하는 음식점인데 이곳의 형편으로 봐선 매우 장사가 잘 되는 형편으로 보인다.

점심을 끝내고 거리를 좀 돌아다니다가 면도용 폼과 크림 로션을 사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서 점점 떨어지는 기온으로 방안에 있어도 추워지는 감각을 어쩔 수 없어 예비용으로 캐비 넛에 들어 있는 담요 두 장을 모두 꺼내어 덮고서야 한기를 쫓아낼 수가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다시 다가왔다. 이렇게 추워서 방 밖을 나가는 외출을 하기가 싫다는 이유를 만들어 저녁식사를 안 하기로 작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의 속내는 그제 저녁 제깐에는 화려한 식사를 한 것에 대한 벌충을 스스로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크다는 걸 부인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결국 식사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시원섭섭한 조금은 허탈한 기분이 들어 냉장고 안에서 맥주 한 캔과 캐슈너트 한 봉지를 꺼내어 자작자음을 시작했다.


여행자들을 맞는 이런 호텔에서는 냉장고 안에 음료수와 맥주 그리고 땅콩류나 과자를 넣어두어 고객이 꺼내 먹은 것만큼의 금액을 체크아웃할 때 따로 현금으로 징수하는 관례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넣어 있는 맥주 두 캔, 소프트드링크류 8캔, 과자 봉지 두 개, 견과류 봉지 두 개, 미네랄워터 네 병을 보았지만 그중 물만 매일 한 병 마셨지 나머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물은 아마도 하루에 두 병 까지는 서비스에 드는 것이지만 그 이상 마시면 그것도 돈으로 계산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역시 넘지 않으려고 절제하며 생활해 왔다.

하나 이번 이곳 호텔에서의 기다림이 내가 잘못 선택한 일도 아니고 지난 28일부터 오늘 31일까지 나흘간을 묵으면서 그 정도의 씀씀이를 통제한다는 것은 스스로 봐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만히 손꼽아 계산해 본다. 28일 아침은 이른 기내식으로 해결한 후 점심과 저녁은 상파울루에서 이곳까지 오며 영원히 놓쳐버린 끼니가 되었다.

또 29일부터 31일까지 점심은 호텔이 아닌-그들은 점심은 서빙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 해결했으며 저녁 식사는 호텔에서 주지만 29일 하루만, 일단 입 밖으로 낸 내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내 체면을 생각하다가 생각지 않게 거하게 먹은 셈이 되었다.

결국 호텔에서 먹은 것은 29일 저녁 식사와 호텔에 머무는 동안의 아침 식사뿐이니 과하게 쓴 것도 없는 셈이다.

모든 것이 이곳에 도착한 후 예기치 못했던 호텔에서의 기다림으로 혹시 회사가 과외 돈으로 너무 많은 경비를 지불하는 게 아닐까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취했던 내 행동이었을 뿐이다.


어찌 보면 멍텅구리 구두쇠 같이 먹을 것도 안 먹으며(세 끼니의 저녁 식사) 아껴본 내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어 회사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가짐을 갖고 있는 내가 순진한 것은 아닌지.


어쨌거나 점심값으로 쓴 돈만큼은 이번 교대 차 출국하며 발생한 다른 지출금과 함께 회사에 청구할 생각이다. 호텔에서 자신들이 안 하는 점심은 뷔페식당에서 먹은 후 자신들에게 넘겨주면 나중에 같이 계산한다고 했지만, 그에 따르지 않고 내가 직불 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넘겨줄 경우 실제보다 많게 덧붙인 청구가 다시 나한테(우리 회사한테) 오게 된다고 믿는 내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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