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장강구를 빠져나오며 도선사를 하선시킨 후 브라질/중국 간의 콩을 운반해준 항차를 무사히 끝내준 후 새로운 용선주인 일본의 가와사키 기선에게 선박 인도 전문을 보내며 받아보는 기상도에는 초보 단계의 열대성 저기압이 필리핀과 대만 사이의 동쪽에서 꾸물거리며 서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우선은 가려고 했던 항정대로 떠나며 우리가 무사히 오키나와 군도 사이를 통과할 수 있게 좀 더 우물거리며 그곳에 머무르고 있어 주기를 바랐다. 태풍-아직은 열대성 폭풍-으로 발전하기 전에 우리 배가 먼저 태평양으로 빠져나가게 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미심쩍은 녀석의 행보에 최대의 관심을 피할 수가 없어 용선주를 통해 기상/항정 서비스 회사의 조언 듣기를 4일 밤에 청하였고 용선주로부터 요청대로 수배했음을 통보받았다.
하룻밤을 지낸 5일 아침에 받아 들은 이멜에 기상정보회사는 당장 동쪽으로 선수를 틀어 일본의 아마미오시마 북단을 향하였다가 태풍과 지나친 후 우전 변침을 하여 달려준 후 132도선에 도착하면 원래 우리가 가려던 항정으로 들어서기를 조언해 온다.
이곳은 조용하고 별다른 징후가 없는 곳이라 그냥 보기로는 우리의 예정대로 항진을 계속해도 우리가 먼저 빠져나갈 것으로도 생각되지만 만에 하나 우리의 예상대로 되지 않고, 태풍이 좀 더 빠르게 움직이며 그냥 서진을 계속할 경우 그대로 태풍과 조우하는 위험한 일이 되므로 두말 안 하고 기상회사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침로를 돌려놓고 보니 아마미오시마 북단까지 240마일 정도의 항정이 되고 지금껏 구로시오의 영향으로 속력도 뜻대로 나오지 않던 게 1 노트 이상 늘어난 모습의 속력을 GPS의 화면에 띠워준다.
태풍 피항을 하지만 마음은 여유롭게 피항 동작을 취하며 이제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다.
저녁 9시경 올라간 브리지에서 만난 것은 밝은 달이 방금 구름 베일을 걷어내며 중천으로 나들이 나서는 모습이었다.
우리 배의 동쪽을 향한 길안내라도 해주려는 양 걷혀진 구름 사이에서 점점 더 밝은 빛을 뿜어내면서 바다 위로 환한 바닷길의 트랙을 만들어 내준다.
태풍이란 불청객을 그대로 잊어버릴 만큼 낭만적인 정경에 잠시 우리 배의 긴박한 사정을 잊어버리고 오늘이 음력 며칠이야? 하며 방으로 내려와 달력을 들쳐보게 한다.
계속 머리 속에 머물러 있는 태풍에 대한 경계심이 다시 브리지로 올라가게 만든다.
그동안 구름이 많이 몰려와서 하늘이 다시 어두워 있고 바람도 제법 그 세기를 키우고 있어 윙 브리지로 나가는 문을 열기가 싫다.
문을 열면 휑하니 달려들 바람의 포옹이 별로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더를 보니 우리의 앞쪽 왼쪽에서 우리의 침로를 가로지르듯이 접근하는 배가 나타나 있다.
당직사관인 일항사의 설명이 지금 그 배는 조타기가 고장 났는지 그냥 그대로 내려가고 있으니 우리 배더러 조심해서 자신들의 뒤로 빠져서 항해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리겠다고 해주었단다.
우리 배의 좌현에서 그 배의 우현 등을 보고 있으니 정식의 항법대로라면 그 배가 우현으로 타를 돌려서 우리 배의 뒤로 빠지는 동작을 해야 하는 건데 거꾸로 우리더러 좌현 변침 하여 자신들의 뒤로 빠져달라고 한 것은 그 배가 이상이 있어서 들어주었기에 말이지 그런 저런 일이 없다면 어림없는 항법 위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피해 주고 이제 멀어져 가는 그 배의 불빛을 보며 내일 아침까지도 수리를 못하고 저런 상태라면 태풍과는 어떻게 조우할 것인지 은근히 걱정이 든다.
어서 빨리 수리를 완결하여 피항할 수 있게 되기를 빌어주며 열심히 우리가 피해 갈 곳을 향해 달리고 있다.
한 번씩 들쑤석거리니 배 전체가 부르르 떨며 그 안에 있는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때문에 잠도 어렴풋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며 밤을 넘긴다. 새벽이 되어 깜박 잠들었던 눈이 떠지자 말자 커튼을 들추고 선수 쪽을 내다본다.
이번에는 우현 쪽 선수 방향에서 밝은 빛을 켜 놓고 기관정지한 채 드리프팅을 하고 있는 배를 만난다.
대만이나 홍콩 등지로 가려던 배인데 태풍의 접근으로 그곳을 갈 수가 없으니 피항을 위해 기다리느라고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우리 배의 뒤로 멀어져 가고 있으니 그 배가 밝혀 놓고 있는 갑판상의 등불 밝기가 점점 퇴색해 가고 있다.
동경 132도선에 도착할 무렵 이제는 정식 태풍으로 승급한 모라꼿은 대만을 향해 달려가느라 우리와는 별 이상 없이 통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대만해협을 통과하는 항로를 택해서 항해했다면 꼼작 없이 태풍의 중심권에 들어서는 재난을 당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지금의 안전한 피항에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후기 : 뉴스 첨부.
8호 태풍 `모라꼿'이 강타한 대만은 50년 만에 최악의 태풍 피해를 입었다.
10일 대만과 홍콩 언론에 따르면 9일 밤 현재 모라꼿이 휩쓸고 지나간 대만에서는 7명이 숨지고 46명이 실종됐다. 또 부상자도 32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와 함께 모라꼿의 영향으로 21억 대만달러 이상의 재산피해를 기록했다.
특히 대만 타이둥(臺東) 현 동부 온천지역에 위치한 즈번(知本)에서는 9일 낮 11시 40분께 강가에 위치한 6층짜리 진솨이(金師)호텔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호텔은 모라꼿이 몰고 온 폭우로 지반이 하천으로 쓸려나가면서 아침부터 강 쪽으로 20도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다행히 호텔이 붕괴되기 전 투숙객들과 호텔 종업원들이 미리 대피해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호텔 붕괴 당시 지번 마을에는 온천욕을 즐기기 위해 방문한 400여 명의 관광객들이 머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