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일본을 떠난 후 항해 중에 계속 강행한 선창 청소의 마지막 작업을 2번 창을 끝으로 어제 JUAN DE FUCA STRAIGHT를 들어서며 겨우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일해준 선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으며 그래도 만족한 마음으로 이제 검사관이 올라와서 합격의 판정을 내줄 것을 기대하며 새벽의 밴쿠버에 도착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 항구를 찾아오면 늘 닻을 내리던 잉글리시 베이가 아니라 밴쿠버 내항의 C- ANCHORAGE에 닻을 내리고 기다리게 되었다.
석탄을 실으러 자주 다녔던 예전에는 이곳 내항까지 들어 올 필요가 없었기에 어쩌면 처음 들어와 보는 곳이란 기분이 들었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니 예전 해운공사 시절 뉴욕 라이너인 코리안 후론티어를 탔을 때 지금 건너다 보이는 컨테이너 부두에 기항하여 펄프 덩어리 화물을 선적한 일이 이 곳과의 첫 인연임을 기억해 낸다.
약간은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서베이어의 승선을 기다리는데 그들을 싣고 오는 보트가 접근해 온다.
대리 점원과 함께 서베이어, 그리고 HOLD BLOCK(주 1*)을 코치해 줄 업체에서 나온 한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이 승선하였다.
대리 점원만 나한테 오고 나머지는 일항사가 안내하여 홀드 검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입항수속을 한참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찾아왔다. 홀드 블록을 담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얼굴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인다.
입항 수속실에 들어서는 그의 등장에 눈길을 돌린 우리에게 그는 선창 청소의 검사에 문제점이 생겼다고 이야기한다. 자세한 내용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지난 항차의 화물 찌꺼기가 남아 있는 위에 그냥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곳이 있고 아직 마르지 않은 페인트가 남아 있는 곳도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순간 기대하고 있던 마음이 무너지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하는 믿고 싶지 않은 결과에 이제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해야 하나 하는 문제부터 떠 올린다.
이 곳에는 소문이 많이 나있는 악명 높은 서베이어가 있다고 선원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가 있다.
제발 그 친구가 올라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승선해온 서베이어는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인도 계의 캐나다인으로 선장 출신인 서베이어지만 우리들이 무심코 같은 직종의 사람이라고 가깝게 생각하고 있다가는 결국 큰 코 다치는 경우를 자주 만났기에 악명이 나있는 그 사람이 오늘 우리 배의 선창 청소 검사를 맡아한 것이다.
이미 불합격 판정을 받아 들었으니 이제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될 것인가 하는 해결 방안을 놓고 이야기를 구하다가 그들이 떠나게 된 시간은 어느새 7시가 다 되었다.
새벽 4시 반에 올라와서 검사한 후 떠나는 그들의 보트 위로는 이미 새벽의 여명이 부서져 버리고 있었다.
이곳을 기항 할 때 마다 세계 3대 미항에 넣어도 꿀림이 없을 텐데 하는 친근한 마음을 갖곤 하는 항구 밴쿠버이다. 지금 그곳을 찾아 가을 하늘을 이고 있는 맑은 새벽의 끝자락을 즐겨도 좋으련만 선창청소 불합격이란 명제로 인해 주위를 회색빛으로 봐야하는 세상이 열리고 있는것 같다. 이제 우리 한테 남겨진 것은 처음보다 더욱 까다로운 검사를 받기위한 재청소를 시행해야 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거다.
이제 뒤치다꺼리로 한참을 더 고생해야 하는 일만을 안아 들게 된 참담한 심정은 이런 경치를 살펴서 구경할 여유를 가질 수 없게 만들고 있건만, 밴쿠버의 산뜻한 새벽은 깨끗한 풍광과 함께 붉은 먼동을 가지고 조용하게 여러 가지 불빛으로 치장하고 있는 내항을 찾아와서 자기를 둘러보라는 듯 한번 더 유혹 어린 색감을 짙게 내뿜어 주고 있다.
이미 선원들은 다시 선창에 들어가며 재 청소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위로금을 요청해 보리라던 내 예정의 생각은 이미 물거품 되어 사라져 버렸고 좀은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청소의 지휘에 임한다.
주 1* : Hold block작업-유황 같은 화물을 싣기 위해 선창 내를 깨끗이 청소한 위에다 선체 보호를 위한 필요한 코팅을 해주는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