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by 전희태

비 오는 날

091205-PAGBILAO-0021.jpg 빗방울이 동그라미를 브리지 갑판 위에 그려주고 있다


091205-PAGBILAO-0071.jpg 비가 와도 작업은 계속하고 있다.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어 주는 흐린 날씨에 는개로 변해 가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사방 모두가 눅눅한 습도를 유지하고 있다. 엊저녁부터 시도 때도 없이 추적이며 내려주든 이슬비로 인해 갑판에 생겨난 빗물의 작은 웅덩이 위에는 또다시 동그란 파문이 그려지고 있다.


무거운 브리지 도어 핸들을 힘들여 잡아 열어젖힌 후 밖으로 나가려던 발길 이건만 다시 시작한 가는 비가 내딛으려는 발걸음을 멈칫거리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발걸음을 멈춰 서며 내다본 바깥은 나서기만 하면 언제든지 소문도 없이 젖어들 게 만들려는 빗줄기가 회색 빛 음울을 속으로 갈무리한 채 조용히 사위를 점령하고 있다.


어렸을 때, 어렵사리 구해진 도화지에다 그림을 시도하려 꺼내었건만 회색 빛 크레파스의 때깔이 너무 강하게 덧 칠 되면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렇게 기분을 마구 구겨주던 낡은 날을 기억 속에서 떠 올리게 만드는 그런 날씨이다.


 그냥 와작와작 찢어 마구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일어나지만 옷을 젖게 만든다고 위협하는 빗줄기의 조용한 반란을 만났으니 문밖으로 나서려 든 마음을 포기하며 카메라의 렌즈만을 내밀어 셔터를 눌러 준다.


 어느 순간 이슬비가 는개로 변하여 빗줄기가 더욱 가늘어진 물방울로 만들어지면서 동그라미 그리던 솜씨마저 거두어 주는 걸 보며 밖으로 나서기로 작정을 한다.


에어컨디셔너의 찹찹한 문안에서 있던 몸이 밖으로 나서니 훅 끼쳐지는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열기가 감싸 온다.


들고 있던 카메라를 살피니 어느새 뿌연 증기막이 렌즈를 커버하고 있는 휠터 위에 내려와 있다.

주머니에서 렌즈 닦이 수건을 꺼내어 조심스레 닦아준다.


그리고 이 회색빛 풍경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잡아내어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카메라를 들어 올려 파인더에 눈을 고정시켜준다.


아직도 약간의 뿌연 기운을 느끼게 하는 파인더 속의 풍경을 보며 다시 렌즈 닦이를 꺼내 든다.


여기는 북위 13도 53.68분, 동경 121도 44.42분 위치의 필리핀 PAGBILAO 항의 발전소 부두이다.


 12월이란 계절을 무색하게 만들어 주는 열대 지방이니 이제 곧 날씨가 맑아지며 해가 나오게 되면 언제 내가 그랬 느냐 싶게 환한 밝음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지방이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뿌연 수채화의 농도를 닮은 풍경을 살피며 어서 해가 나오는 밝은 날씨로 변해 달라고 속으로 빌어 보는 마음은 왜 그러는 것일까?


아침나절 주저리주저리 나타나서는 갖고 온 배낭에 하나 가득 선물(?)을 채워서 내려가던 이곳 입항 수속을 하던 관리들의 모습에 괜히 화가 난 심정이 이렇게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까지도 투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벽에 도착 투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