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도착 투묘

항해와 정박의 변환 시점

by 전희태


0911022-PAGBILAOD7_0131.jpg 접안을 위해 접근할 때 보이는 파그비라오 부두의 전경


나흘간의 항해 끝에 도착하려는 필리핀 PAGBILAO항의 새벽녘.

미리 해도에 표시해주어 그곳에 도착하거든 연락하라고 해 놓았던 곳에 다 왔다는 통보를 아직 받지 않았는데 절로 잠이 깨어났다. 순간 이제쯤 은 예정된 곳에 도착했을 텐데 왜 연락이 없지? 하는 심정으로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고 브리지로 향했다


해도실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 유일하게 밝혀져 있는 등이 비치고 있는 해도부터 살펴서 선위를 확인한다. 아직 내가 표시해 주었던 곳에는 도착하지 못했지만 거의 다가서고 있는 형편이라 그런대로 시간 맞추어 브리지에 나타나 준 셈이다.


선장이 선교에 나타났으니 혼자서 짊어지고 있던 항해당직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 편해진 마음일 게다. 당직 사관이 반갑게 인사하면서 맞이해 준다.


어제 마음속에 셈해두고 있던 대로, 어떻게 도착 예정지에 접근을 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닻을 내리겠다는 예정을 다시 점검하며, 기관의 사용을 반속으로 하도록 명령을 내려준다.


그래 놓고 보니 좀 서둘러서 기관 사용을 시작했다는 후회의 마음이 살짝 들어선다. 두 번째 찾아오는 이곳에서 요번에는 투묘 시간을 최소로 줄여보겠다고 맘먹었던 결심이 이렇게 서두르는 비람에 어그러지는 것을 예감하게 된 것이다.


어느 정도 투묘지로 가까이 갈 때까지 속력의 변화를 안 주어도 된다는 계산은 하면서도 막상 투묘지에 가까워지게 되면, 육지가 너무나 빠르게 가깝게 다가서는 것으로 느껴지면서 조심해야 한다는 마음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서둘러 기관사용을 하게 되고 그런 반복이 결국 기관의 사용 빈도를 늘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 놓고는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 하는 발상의 화두는 늘 똑같다.

혹시 갑작스러운 돌발사고라도 생겨서 조선에 영향을 끼칠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미리미리 조심해서 조선하는 게 좋은 게 아니냐? 는 자기 합리화에 덧칠하는 생각으로 얼렁뚱땅 넘기려 하는 것이다


한참 선장으로 물이 오른 전성기의 세월이었던 때, 삼천포 화력발전소에 석탄을 실어다 주던 80년대 어느 항차 경험한 일이다.

도착 즉시 수속이 가능하다는 빠듯한 시간에 맞추기 위해 마지막까지 기관사용을 최대 출력으로 하며 다가섰다가 평소 다른 때보다는 좀 바쁜 시간 내로 기관 반전을 시도하며 급하게 투묘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전에도 좀 비슷한 상황의 경험은 가지고 있었기에 크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엔진 정지 후 반전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렇긴 해도 그때에는 좀 무리한 사용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며 말을 잘 듣던 기관이었는데, 마치 -잘 걷던 당나귀가 발걸음을 멈춘 후 꿈쩍할 생각을 버리고 버티는 것 같은 일이 우리 배의 엔진에 생긴 것이다.


명령 받은 후진 지시에 제대로 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틀림없이 과도한 전진 타력으로 인해 사고라도 날 수 있는 급박한 형편이 발생한 것이다.


급해진 돌발 상황이었지만 나는 침착한 마음을 돋우어 내며 과도하게 남아 있는 전진 타력(前進惰力)을 좀 더 줄여주기 위해 타각(舵角)을 최대로 교대하여 사용하는 조타 명령을 내려줬었다.


이 명령은 배를 선회(旋回) 시키기 위해서 발령(發令) 한 것이 아니고, 최대 타각을 만들어 주면 타효가 생겨 선회에 드는 힘으로 변환되면서, 전진 속력에 최대로 저항하는 힘이 생기는 걸 이용하려는 의도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배의 선수가 슬슬 돌아가려는 기미를 보이려는 순간, 다시 반대편 쪽으로 최대 타각의 타를 쓰도록 반전시키면, 배는 침로는 유지하지만 전진 속력은 줄이게 하려는 조선 법이다.


그런 비상 대책으로 다행히 타력이 줄어들었고 그때쯤엔 엔진의 후진 출력도 가능해져서 비상투묘-너무 과도한 전진 타력으로 육지나 물표 등에 위험하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닻을 사용하는 경우-를 하지 않고도 원하던 곳을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적당한 곳에 정식 투묘를 할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투묘를 위해 접근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미리 준비하는 차원에서 충분한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 사용 준비를 시켜가며 조선을 하게 되어서, 나의 투묘 방법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향을 갖게 된 것이다


아직도 밝은 음력 18일의 달이 구름 속에 숨어든다. 아무래도 짙어지는 구름이 비라도 뿌려 줄 것 같은 어둠을 끌어들이려는 속에 원하던 장소에는 좀 못 미쳤지만 괜찮아 보이는 안전한 장소에 도착 투묘 명령을 내려준다.


촤르르! 쏟아져 내려가는 체인의 소리와 함께 선체가 약간 휘청거리는 감각이 선수부 쪽에서부터 부르르 떨면서 브리지 내로 전해져 온다.


이윽고 닻이 제대로 투하된 것을 확인한 후, 닻줄(앵카 체인)도 필요한 양까지 내주도록 한 후 기관사용 종료를 기관실로 통보토록 지시를 하니 항해 당직사관의 복명복창과 함께 이번 항해는 끝이 났다.


드디어 브리지 내부의 조명등을 켜도록 지시를 내려주면서 조타수가 근무하던 항해 당직 까지도 끝이 난다. 지금껏 타륜을 붙잡고 복명복창을 하며 타를 써주던 조타수가 타륜을 놓고 실내 스위치를 올려 브리지 내부 조명등을 켜주며 갑판상 모든 조명등 스위치까지 올려주어 외부의 어둠도 밝혀준다.


새벽의 어둠에 젖어 있던 브리지 내부에 밝은 실내 조명등이 들어오며 그 시간까지 어둠 속에서 같이 당직을 서던 사람들이 서로의 모습을 보며 무사히 도착하여 항해의 완성을 함께 한 기쁨을 나눈다.


-선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자네들도 수고 많이 했어!

-자! 뒤처리하고 정박 당직자들은 좀 더 수고해주게나.


같이 항해 당직에 임하고 있던 선원들의 수고를 치하해주어 마무리 인사를 건네준 후, 새로이 정박 당직으로 전환된 당직자들에게 계속 수고하기를 지시하며 브리지를 떠난다. 항해와 정박이 교대한 시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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