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켜진 변압기의 겉면 커버를 이루고 있는 얇은 철판이 둥그렇게 휘어져 있는 곡면 부분을 스치듯 지나치다가 날카로운 끝 부분에 살갗이 찢어졌다.>
슬슬 호주 입항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느라 메인 갑판상에 있는 발라스트 컨트롤룸(선내 하역 사무실 겸용)을 찾아가 서류 정리를 위한 포토 카피를 떠내었다.
제대로 다 된 서류를 보다가 컴퓨터가 좀 느리게 행동하는 것 같아 바이러스 치료인 알약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떠 올린다.
240 여일 전에 알약 치료를 받았다는 표지를 보며 정밀 치료를 시작하기로 한다. 하나 이 컴퓨터는 일항사를 위시한 갑판 사관들이 사용하는 것인데 혹시 내가 말없이 바이러스 치료에 나선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어 상황을 메모하여 컴퓨터 앞에 붙여주려고 주위를 살폈다.
연필 몇 자루가 눈에 뜨이고 메모지로 쓸만 한 종이도 보이기에 무심코 집어 들려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침 그 종이를 자신의 뒤에다 두고 있던 전기 파워를 컴퓨터와 주변기기에 감압하여 주려고 설치된 작은 변압기가 마치 종이를 가져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 것은 아닐 테지만, 내 손과 스쳐 지나는 순간 가운데 손가락 등의 뿌리 부근에 기분 나쁜 감각을 만들어 준다.
별로 아픈 상황이 아니라 손등에 약간의 껍질이 벗겨지는 정도의 상처겠거니 여기고 내려다본 상처는 의외로 깊어서 길이 1센티미터 이상의 칼로 찢어 놓은 것 같은 째어진 상처가 약간 부풀어 오며 금세 피가 스멀스멀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선홍색의 피를 보며 생각보다 깊어진 상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는 상념에 잠시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손가락 사이를 흘러 넘친 피는 그칠 생각이 없는지 조금씩 뭉치며 엉키는 과정까지 보여주며 떨어져 내리고 있다.
-어! 피다.
하며 어쩌다 자신의 몸에 난 상처에서 피가 나오는 걸 보고 그만 까무러쳐 버렸었다는 셋째 처남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웃으며 하던 아내가 문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살펴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여긴 그리 할수 있는 아내와는 만리를 넘어 떨어져 있는 배 안이다.
더 이상 우물거리기가 부담스러워 얼른 치료를 위해 브리지에서 당직 서고 있는 3 항사를 찾아가기로 한다.
배의 수선 위 첫 층인 주갑판상의 발라스트 컨트롤 룸에서 브리지까지는 네 개의 층을 올라가야 하는 높이이다.
상처 받은 오른손을 좀 높이어서 될수록 피가 덜 나오게 하며 조심스레 층계를 오르면서 일순 황당한 마음이 들어선다.
-이게 뭐란 말이야 참!
무언가 나한테 생길 커다란 일을 막기 위한 푸닥거리로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을 돌려 보기로 한다.
하기야 몇 바늘 꿰맸으면 좋겠는데 꿰맬 바늘도 실도 없고, 또 제대로 수술할 사람도 없는 상황임을 짐작하면서도 3 항사를 만나면서 물어본 첫말은 꿰맬 수 있는 실과 바늘이 있는 가? 였다.
실과 바늘이 있다면 관운장은 아니더라도 한번 그냥 생살을 꿰매어 내며 그 아픔을 꾹 참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면서 물었던 말이지만,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꿰매는 수술만 하면 한 닷새면 끝날 것이란 짐작을 해보지만 그럴 방법이 없으니 그냥 소독을 잘하고 치료하기로 한다.
전자의 방법보다 치료 기간이 배 이상 걸리겠다는 예상이 들어서지만 덧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치료를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