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우리나라 섬의 이름들

by 전희태
100110-E2_0081.jpg 브리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일출 후의 태양



맞바람이 선수를 못살게 굴며 황파를 선사해 주는 속을 그래도 덧없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니 어느 날 어느 순간엔 가는 잔잔한 바다에 안길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달려온 보람은 있었다.


여수 외항 D-2 묘박지에 닻을 내려줄 때인 저녁 1736시. 서산(돌산도)을 넘어가려던 저녁 해가 심홍색으로 변한 얼굴을 치켜들며 비추고 있었다.

마침 우리 배가 지정받았던 투묘지를 선점하고 있는 배가 있어 그 옆을 조심조심 지나쳐서 새로이 닻 내려 줄 자리를 찾으려 열심히 선교 지휘를 하고 있든 내 얼굴에 그 마지막 빛이 비스듬히 비쳐 드는데 그 눈부심이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조심스레 눈을 감아가면서, 아직은 조금 남아있는 저녁노을의 잔광 속의 어둡기 전에 투묘를 끝낸 것이 마냥 편한 마음을 갖게 하였다. 투묘를 마치자마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벙커 바지가 득달같이 옆에 와 매달린다. 용선중인 선박의 분초를 다투는 시간과의 전쟁이 실감 나는 상황이다.


 그렇게 기름 받기를 시작하니 이미 사방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묻혀 들어가며 싸늘한 초겨울밤의 차가운 바람이 한 번씩 뱃전 위로 파도라도 올려줄까 호시탐탐 노리는 것 같다.


내항으로 들어갈 예정까지 세웠던 기상 상황이 많이 나아져서 그냥 외항에서 급유키로 한 것인데 그런대로 잦아들기 시작한 파도와 바람으로 작업에는 별 지장이 없어 다행이다.


DO: 40 TON에 FO: 610 TON을 받기 위해 찾아 들어온 여수항인데 예정했던 작업이 모두 순조롭게 밤 열 한시가 되어가며 끝이 났다.

곧 이어서 닻을 감아 들이기 시작하여 출항을 서두른다.


새롭게 지정받은 투묘지인 D-2 묘박지에 닻을 내릴 때 그곳 부근에 있다는 것을 알아 레이더로는 확인하면서도 눈으론 미처 찾지 못했던 항로상의 부표가 유난히 밝은 초록색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어 가깝게 느껴지게 해서 혹시 그쪽으로 선수를 돌리는데 지장을 받는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일게 만든다.


 무사히 닻을 감아 들였고 엔진을 가동한 후 타를 우현으로 전파하여 준다. 항로상에 들기 위해 하는 조선 행동이다. 선수가 천천히 우현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우현의 초록 등부표의 모습을 유심히 살핀다.


 0.6마일 떨어진 상황이니 무사히 선수의 왼쪽으로 옮겨주며 항로로 들어설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살핀다.


 드디어 항로에 다시 들어서서 예정한 침로대로 움직이며 속력도 증속 시켜 완전 출항에 대비한다.


앞으로 한 시간쯤 지나면 작도를 우현으로 두고 오른쪽으로 변침하여 남해안의 항로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항사에게 브리지를 맡기고 방으로 돌아온다.


아직 끝나지 않은 출항 보고 등을 작성하여 이멜로 전송시킨 후 오늘 하루 계속 서서 일한 다리를 쉬어주려 침대에 눕는다. 새벽 두 시이다


입출항 시간과 함께하는 바쁜 날이 되면, 늘 상 있는 습관에 따라 새벽이 찾아오면 그냥 잠에서 깨어난다.


새벽에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브리지로 올라간다. 그동안 배는 밤새 작도에서 변침한 후 소리도를 지나치고 역만도를 오른쪽 옆에 두면서 265도로 변침하여 거문도를 왼쪽으로 하여 본격적인 남해안 순항 길에 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초분(草墳)의 풍속을 지니고 있었다는 초도를 위시한 장도, 황제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을 지나, 청산도와 여서도 사이의 뱃길마저 지나쳐 버릴 무렵, 이곳 부근에서 제주도 한라산 까지는 직선거리로 40마일 정도 되는데, 여기에서 여서도 뒤쪽 배경으로 거대한 삿갓 모양의 제주도를 쨍한 햇빛 아래 볼 수 있었던 경험을 나는 가지고 있다.


하나 그건 굉장히 어려운 확률을 지닌 풍경으로 만약 이곳에서 그 풍경을 구경하게 된다면 그 후에 꼭 찾아오는 별로 좋지 않은 기상 상황이 있다는 속설을 생각한다면, 선뜻 나서서 보고 싶은 구경 꺼리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삿갓 모양의 뚜렷한 제주도의 모습이 환한 햇빛 아래 나타났던 모습은 누구나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평생에 한 번쯤은 꼭 보여주고 싶은 풍광임에는 틀림없으리라 여겨본다.


 배는 이제 소안 군도라는 이름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안도, 노화도, 보길도를 오른쪽으로 두고 지나가며 그들 섬의 아래에 끼워져 있는 것 같은 작은 섬 그러나 등대가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는 섬 자개도 마저 지났다.


그 자개도의 남서쪽에는 출운초라는 물속에 숨어있는 바위가 있어 예전에는 이곳을 지나다닐 때 무척 성가신 마음을 갖게 하던 그야말로 암초였는데, 지금은 현대식 장비를 갖춘 등표가 설치되어 빛을 발하고 있는 등대로 변했으니 항해자에게는 얼마나 다행하고 기분 좋은 일인가?


그 출운초를 피하기 위해 약간의 지그재그 침로를 설정해야 하던 이곳에서 자개도(者開島)라는 섬의 이름이 한때는 자지도(者只島)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서 그 섬에 있는 등대를 확인하며 이 앞을 지나야 했던 많은 항해자들이 웃음을 띠우며 한 번씩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 역시 새삼스럽다.


그래 오늘 오랜만에 만나게 된 그 섬의 모습을 보면서, 이미 자개도(者開島)라고 깨끗이 개명하여 해도상에 이름 써진 상태까지 확인받으면서도, 해도에 그려진 섬의 윤곽이 어머머! 예전의 진짜 한글 이름 같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웃어 본다. (이 섬은 그 외에도 항문도(港門島)라는 이름도 가졌었는데, 현재는 신라 청해진(淸海鎭) 시절 옛이야기에 따라 1982년에 당사도(唐寺島)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계속 서쪽으로 가면 또 다른 암초가 그야말로 항로의 가운데쯤의 넓은 부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어느 쪽으로 통과해야 할 가를 고민하게 만들던 복사초라는 이름으로 버티고 있다.


지금은 그 녀석 위에다 역시 등표를 세워 주어 밤이나 낮이나 걱정 없이 그 옆을 지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복사초를 왼쪽으로 두고 북서진을 하면 병풍도를 지나며 맹골수도, 거차 수도로 갈라지는 남해안의 서쪽에 다다르게 된다.


이 병풍도는 마치 바다 위에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모습의 바위섬으로 1970년대이던가 당시 해운공사의 천지호라는 탱커가 악천후 속에서 항해장비의 고장으로 인해 그 섬에 좌초하게 되어 선원들도 몇 명 순직한 큰 사고가 있었다.


우리 배는 지금 그 복사초를 오른쪽으로 멀찍이 떨어뜨리며 맹골수도의 외해 쪽 바깥으로 돌아서 소흑산도와 삼태도 사이를 뚫고 지나 중국의 산둥반도의 끝단을 바라고 331도로 북서진 하는 침로를 세워두고 있다.


여기서 해도상으로지만 소흑산도, 삼태도, 대흑산도를 보며 황해로 들어서며 마지막으로 우리 국토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홍도를 멀리 그 실루엣이나마 살피며 북서진 하면 이틀 후에는 중국 발해만 안의 JINGTANG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정다운 우리의 섬들을 지날 때 날씨는 조용하게 우릴 배웅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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