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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Feb 22. 2019

아버지

짐을 풀고 있던 본선 뒤쪽에 아주 가까이 접안하여 신경 쓰게 하던 배가 짐을 먼저 싣고 떠나려 하고 있다.

 SEAMEN'S CLUB 앞에서 -아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다운로드하여 보려고 컴퓨터를 등짐으로 지참하고 상륙한 모습이다.

SEAMEN'S CLUB 앞에서 -아버지

-



 아랍에미레이트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보게 된 곳이다.

1970년대 중반에 두바이를 비롯한 쿠웨이트 등 이곳 중동에 다녀 본 이후 처음으로 찾아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을 이곳과 관계없는 항해를 하며 살아온 셈이다.


 이제 MINA SAQR이란 이름의 항구에 FELD SPAR란 화물을 실어다 주는 일로 찾게 되었는데 다른 곳과 달리 입항 서류에 요구하는 선원명부에 대해 굉장히 까다로운 요구를 해 오고 있다.


 FIRST NAME , MIDDLE NAME, LAST NAME으로 이름을 모두 적어 넣어 주길 요구하므로 한국 선원들은 결국 이름을 띄어쓰기로 나누어 이 모든 요구에 응하기로 작정하였지만, 인도네시아 선원들 중 이렇게 세 가지의 이름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나머지는 두 부분으로 나뉜 이름만 가지고 있고, 그중의 두 사람은 아예 성은 없이 이름만 있는 모양이다.


 대리점이 요청해 온 케이스에 이렇게 이름만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을 넣어서 완성해달라는 부탁이 있기에 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3 항사에게 사전 조사를 시켰다.


 오후 저녁 식사 전까지의 시간을 들여 조사해 온 내용을 보고 하면서 3 항사가 몇 마디 말을 덧 붙인다.


 -아버지 이름을 물으니까 한 친구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울먹이는 투로 이야기를 하는데, 

 또 한 친구는 그까짓 아버지 뭣 하러 이름을 알아야 하느냐고 화를 내더군요.


전자의 선원이,

-아버지가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하고….

하며 울먹이던 모습에 짠한 감정이 들어와 그냥 등을 두드려 주며 겨우 써 준 것을 들고 나왔으며,


 후자의 또 다른 선원은,

-엄마가 자기를 낳고 난 후 우리 모자 모두를 버리고 떠나가 버린 아주 밉살스러운 아버지인데…… 

증오심까지 품은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그 친구에게는 입항지 대리점에서 그렇게 라도 해서 이름을 메우어 달라고 한다고 말하며 겨우 이름을 써 받아 들고 그 자리를 나왔 단다.


 이렇게 차분히 조사해 온 선원들의 이름 리스트를 내 보이며 보고를 하는 3 항사는 바로 나의 둘째 아들이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부모의 직업을 이어받아 일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선원이란 직종에서도 그렇게 대를 이어 승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 일게다.


 하지만 나와 같이 부자가 같은 한 배에 승선하여 근무하는 예는 거의 없는 일이다. 사실 처음 회사로부터 이 배에 배승 해주도록 요청받았을 때에는 먼저 타고 있던 아들을 떠올리며 거절하기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의 승선 요청을 거절했던 안면이 아무래도 씁쓸하니 마음에 와 닿아, 그냥 승선하겠다고 승낙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사 일들은 동전의 양면 마냥 모두가 장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기에 같이 타는 것에 불편한 점이 있다면 틀림없이 좋은 점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억지로라도 들어 올리며 그 좋은 점을 극대화하며 생활하리라 작정하며 승선을 수락했던 것이다.


 이제 그런 상황하에서 우리 배의 선원들 중에 아버지에 대한 아들이 품고 있는 극단적인 생각을 알아내려는 설문이라도 실시한 것 같은 일을 벌이게 된 것이 무슨 뜻이라도 있는 일인 양 이채로운 생각마저 들어선다.


 게다가 이번 항차 중에 선원이란 직업이 가장 슬프게 느껴지는 일을 당한 선원도 생긴 것이다. 인도네시아인 기관부 선원이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도 집에 가지 못한 일을 겪게 된 것이다.


 당시 부음을 연락받았던 시기에 급하게 수속하고 준비하였다면, 집에 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있었지만 그는 송출회사와 선원 관리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귀향을 포기하고 계속 승선을 이어 가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가 암을 앓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 병원비를 벌려고 집을 떠난 상황이라 중도 귀국은 집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그리 결정을 하였지만, 그날 밤 그가 자신의 방을 걸어 잠근 후 슬프게 울고 있더라. 는 보고 역시 3 항사로부터 받았었다.


 선장으로서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그가 아버지의 장례식 및 그 뒤치다꺼리를 위한 의논을 하려고 집으로 건 위성전화 사용요금을 징수하지 않고 감면해 주도록 조치해 주었다.


 그 정도의 경비라면 그가 중도 귀국하지 않고 계속 승선해 준 것만으로도 그 액수 이상의 경비 절약을 우리 회사에 해 주었다고 믿기에 그런 결정을 내렸고, 부의(賻儀)의 풍속이 없는 그들에게 한국인의 따뜻한 상부상조하는 마음을 보여주려는 뜻 또한 가지고 실행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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