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장 Oct 17. 2023

쉬이 잠들지 못하는 고요함


  지난 주말, 아가의 100일 잔치를 치렀다. '100일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드디어 나도 100일의 기적을 체험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100일의 기적 대신 100일의 '기절'을 맛보고 말았다.



  기절을 맛보는 상황에서도 용케 책 한 권을 읽어냈고, 어찌 저찌하여 목표로 했던 글쓰기 양도 꾸역꾸역 채워냈다. 그러고 보면 100일의 기적을 경험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저 어려운 것들을 해냈으니 말이다.



  아가는 어느 새부터 통잠에 가깝게 자기 시작했다. <19시 수유 / 22시 수유 / 01시 수유 / 04시 수유>에서 시작한 아가의 먹텀이, 22시 수유와 01시 수유가 차례로 없어지면서 전보다 긴 잠을 자게 된 것이다. 덕분에 육아하는 아빠는 22시 무렵 일찍 잠에 들어 새벽 4~5시에 일어나는 바른 생활 어른이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고요하고 상쾌한 새벽 시간에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소중한 시간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가가 100일이 되기 얼마 전부터 새벽잠을 힘겨워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 번이라 생각했던 찡찡 거림은 100일을 넘어서 한동안 이어졌다. 덕분에 아빠는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쪽쪽이도 물려주고 토닥여주기 하면서 아가를 재워보려 애썼지만, 어느새 퀭한 눈으로 동이 터오는 아침을 맞이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가가 밤잠을 많이 못 자서 낮 시간의 생활을 잘 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해가 떠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가는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며 무사 무탈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아빠는 서서히 좀비가 되어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규칙적이었던 생활은 무너졌고 밥 먹고 청소하는 시간에도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마음 편히 책읽는 시간도 줄어들었고, 글을 써내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상황이 이어졌다. 더 이상 내려놓으면 안 되는 것들만 간신히 붙든 채 버티기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을 '잠'이라고 생각하며 '나에게 잠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져보았다. 



  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잠을 통해 지나간 하루의 피로를 풀고 새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물론, 공부나 업무 때문에, 혹은 너무나 하고 싶은 취미 활동 때문에 하루 이틀 밤을 새울 수는 있지만, 잠 없는 삶을 지속하는 것은 결코 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굳이 밤을 새울 필요도 없이, 평소보다 수면시간을 조금만 줄여도 '자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할 정도이니 말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적절한 수면의 양과 질은 제각각 다를 것이다. 나에게 적절한 수면 시간은 대략 6시간~7시간 정도임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단, 일찍 자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 말이다. 22시에 자서 04시에 일어나는 수면과 02시에 자서 08시에 일어나는 수면은 동일한 양의 수면처럼 보일지라도, 기상 이후 삶의 질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되도록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하는 방향을 택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침형 인간인게 분명한 듯하다.



  잠을 잘 자야 소중한 것을 지킬 수도 있다. 조종사가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 중 '사생활 안정'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근심 걱정이 많은 조종사는 임무 준비에 소홀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비행 중 고도의 집중력과 판단력을 발휘해야 하는 때에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종사는 늘 사생활에 문제가 없도록 일상생활을 잘 관리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적절한 수면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안정적인 사생활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동료 조종사들은 잘 자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자는 시간을 아까워한다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그 어떤 시간보다 수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잠을 줄여야만 가치 있는 것을 얻기도 한다. 한창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는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자면서 공부하곤 했다. 부족한 잠은 학교 수업 시간 사이사이 책상에 엎드려서 보충했던 기억이 난다. 쉬는 시간 종이 치면 잠이 들고 수업 시간 종이 치면 깨어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스터디 머신'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조종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준비할 때도 잠을 줄여가며 공부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한창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어느 회사의 신입 사원이었다. 때문에 주경야독으로 시험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출근한 날 퇴근하는 것이 소원'이었을 정도로 공부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하는 수없이 출근 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책상에 앉아야만 했다.



  나는 잠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사실을 조종사가 되어서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회사 생활을 할 때는 야근을 밥 먹듯 했다. 야근만 하면 다행인데, 야근하고 술도 마셔야 했다. 정해진 업무 시간 동안 일이 많고 바쁜 건 견딜만했지만 불필요한 일 때문에 야근을 하느라, 의미 없는 대화로 가득 찬 회식에 참석하느라 나의 소중한 수면시간이 줄어드는 상황을 견디는 건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런데 웬걸? 조종사가 되니 야근, 회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야근, 회식이 있어도 다음 날 비행이 있는 동료들이 늘 존재했기 때문에, 야근과 회식에 긴 시간을 할애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쓸데없는 야근, 회식이 없으니 매일 밤 편안하게 잠드는 것이 일상이 될 수 있었다. 비로소 천직을 만났구나 싶었다.



  그 정도로 잠을 좋아하는 내가... 지금 아가를 돌보고 있다. 새벽마다 퀭한 눈을 하고 말이다. =_= 그래도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 아내가 있다. 지난 토요일, 드디어 비장의 무기를 사용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아내가 아가에게 맘마를 먹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 그리 아름답던지!! 아... 달콤한 나의 잠이여... 



  이렇듯 달콤한 잠은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힘들고 어려운 일 때문에 지쳐있다가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포근한 이부자리에 누워서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개운한 몸과 마음을 얻게 된다. 나는 오랜만에 맛본 '꿀'잠 덕분에,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듯했다.


 

  우리 아가의 기적은 아직 소원한 일이지만, 요행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일상을 견디다 보면 언젠가 기적을 만날 수 있겠지? 기적을 전하는 그날을 기대하며... 이만 총총총... +_+




작가의 이전글 What's your ETA ?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