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날 수 없는 무한 루프...
육아 휴직한 아빠에게 출근시간, 퇴근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행히 아내님의 친절한 배려가 있다면, 출근시간과 퇴근시간 '처럼 보이는' 시간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새벽 1시 30분>
출근시간이 되었다. 알람이 울리면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수유 중인 아내에게 달려가 문안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는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가 세수와 양치 + 가글을 하고 출근 준비를 마친다.
<새벽 2시>
본격적인 근무시간의 시작이다. 수유를 마친 아가의 트림을 돕는다. 트림을 돕기 위한 토닥임의 시작시간은 정해져 있으나 끝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아기가 불편해하지 않을 때까지 연신 등을 쓸어줄 뿐이다. 회사 부장님의 트림 소리 같은 '꺼억-'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추가 서비스가 필요할 때가 많다.
트림을 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아기의 평온한 표정을 볼 수 있다. 이제 아기를 침대에 눕힌다. 방심은 금물! 평화는 언제나 깨지기 마련임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나는 약소국이다. 절대 절대 강대국인 아기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아기에게는 외교전략 따위는 먹히지 않는다. 항시 낮은 자세를 견지하고 좁게 열린 방 문틈 사이로 아기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다행히 휴전 기간 아니, 쉬는 시간이 지속되면 나에게도 달콤한 자유가 주어진다. 이때 보통 글을 읽거나 글을 쓴다. 육아공부에 필요한 책도 읽는다. 물론 가끔 축구게임도 한다. 길어야 두 판(30분)을 넘기지 않는다. 게임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게임하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건 함정...
<새벽 6시>
새벽 5시면 멀리서 동이 터오며 서서히 짙은 어둠이 물러난다. 학창 시절 공부할 때도 밤을 새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벌써 2주째 아침이 밝아오는 걸 보고 있다.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가 굉장히 평화롭게 느껴지지만, 명심해라!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창문 틈으로 밀려드는 새벽 공기의 향을 잠시 만끽한 뒤, 빨래건조대에 걸려 있는 아이 옷, 수건 등을 개서 정리하고, 지난밤 설거지를 해두었던 식기를 정리한다. 개수대 옆에 쌓인 젖병을 씻고 소독기에 넣는다. 밀대에 정전기 청소포를 붙이고 아기 방을 시작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며 먼지를 훔친다. (남들 다 잘 때 먼지를 '훔치고' 있자니 도둑이 된 것 같다. 행동도 아주 조용조용 주도면밀하니 말이다.) 먼지를 훔치고 나면 물청소포로 교체하여 다시 한번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닦는다.
<오전 7시>
이때즘 아내가 일어난다. 나는 슬며시 퇴근을 준비한다. 출근 준비가 세수하고 양치하는 것이었는데, 퇴근 준비도 똑같다. 세수하고 양치한다. 아내에게 새벽에 있었던 이슈에 대해 브리핑을 하면서 업무 인수인계를 마친다. 예를 들면 밤사이 강대국의 침탈이 몇 번 있었는지와 같은?
<오전 8시>
기절하듯 퇴근한.. 아니 잠에 든다.
<오전 11시 30분>
다시 출근한다. 다행히 낮에는 두 약소국이 합심하여 강대국을 상대한다.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이제 싫어졌다. 혼자 일하는 건, 특히나 밤과 새벽에 홀로 일하는 건 너무너무 무서운 일이다. 야근수당을 배 이상으로 올려줘야 한다.
점심을 차린다. 점심을 먹는다. 점심 먹은 걸 치운다.
밥을 짓는 건 이제 제법 익숙해졌지만, 밥상을 차리는 건 여전히 너무 고역이다. 창의력이 제로에 수렴해서 그런가. 요리라도 할라치면 스트레스 지수가 마구마구 샘솟는다. 다행히 약소국 두 나라 곁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랜 우방국, 장모님이 계신다. 이따금씩 등장하셔서 두 약소국에게 식량을 지원해 주신다. 오시는 날과 오시지 않는 날의 삶의 질은 천지 차이다.
오후 5시 30전까지 아기를 먹이고, 재우고 기타 등등의 일정을 소화하며, 틈틈이 자유일정을 갖는다. 굳이 루틴을 꼽자면 달리기를 한다는 것 정도? 아직까지는 격일로 잘 달리고 있다. 30분 코스. 돌아와서 샤워하고 뭐 하고 하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오후 5시 30분>
저녁을 차린다. 저녁을 먹는다. 저녁 먹은 걸 치운다.
이때 몰아두었던 설거지를 한다. 얼마 전에 식기세척기를 선물 받았다. 아내로부터. 선물 받았다. 아내가 나에게 선물로 식기세척기를 주었다는 말이다... 좋다. 식기세척기 마저 없었다면 매일 저녁 주방 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겼을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포함해서 분리수거 쓰레기를 처리한다. 아기 기저귀가 참 많다. 갑자기 약소국의 설움이 밀려온다. 저녁을 먹고 격일로 아기를 목욕시킨다. 모든 집안일과 육아 관련 일을 통틀어 아기 목욕이 제일 힘들고 어렵다.
주방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아기 욕조 두 개를 가져다 놓고 아기를 씻긴다. 허리며 팔이며 다리며 어깨며, 두 약소국이 그야말로 '박살이 나는'것 같은 시간이다. 몸이 힘든 건 둘째치고 아기가 혹여나 다칠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 때문에 더 진이 빠지는 것 같다.
<저녁 9시>
이제 다시 퇴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겠네?'라고 생각하는 여유도 잠시 부려본다. 2주밖에 안 지났는데, 2개월, 2년은 지난 것 같다. 정말이다.
그래도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