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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장 Dec 12. 2023

내 모든 순간을 기억해 주는 이 (25)

출처 : “아가, 너의 모든 순간을 엄마·아빠는 기억할게” (yeongnam.com)



  나는 어린 시절부터 꽤나 격하게 노는 걸 좋아했다. 그 덕분에 몸 여기저기에 여러 개의 흉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중 딱 두 개의 흉터에는 사연이 있다. 누군가의 슬픔이 깊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흉터를 가지고 있는 당사자인 나는, 그 흉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흉터가 언제 생겼고, 왜 생겼고, 상처가 났을 당시에 얼마나 아팠는지 등등,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런데 누군가는 흉터가 생기게 된 사연을 아주 자세히, 정확하게 알고 있다. 



  두 개의 흉터 중 하나는 왼팔 팔뚝에 있는 직경 10cm 정도 크기의 둥그스름한 화상 자국이다. 이 상처에 대한 사연은 내가 갓 돌이 지났을 무렵, 무언가를 열심히 집고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아기 때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께서는 식사를 준비하면서 밥상 위에 콩나물국을 올려놓으셨는데, 바닥을 기어 다니던 내가 밥상 끄트머리에 있는 국그릇을 잡아채 엎어버린 것이다. 뜨거운 콩나물 국물은 아기였던 나의 왼팔에 쏟아졌고, 그 사건 때문에 내가 알지 못하는 첫 번째 흉터가 생기게 되었다.



  다른 흉터는 왼쪽 눈썹 중간 즘에 보이는 가로 모양의 꿰맨 자국이다. 이 흉터는 내가 4살이던 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제 막 부모님과 떨어져 자는 데에 적응해갈 무렵, 나는 유독 그날따라 엄마와 자겠다고 떼를 썼다. 어머니께서는 하는 수없이 나를 옆에 눕히셨고 그렇게 잠이 드셨다. 



  안방에는 작은 밥상이 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누운 자리 발밑에 밥상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밥상이 벽에 기대어져 있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별 일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잠을 청하셨다. 나는 잠결에 조금씩 꿈틀거리며 밥상 쪽으로 몸을 움직였고, 마침내 밥상을 발로 차게 되었다. 밥상은 엎어졌고, 밥상 모서리는 그대로 나의 왼쪽 눈썹에 부딪히며 생살을 찢어놓았다. 그렇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두 번째 상처가 생기게 되었다. 



  지난주, 하마터면 우리 아가도 아빠처럼 기억하지 못할 흉터를 안고 살아갈 뻔했다. 나 역시 누군가처럼 마음속 깊은 흉터를 안은 채 살아갈 뻔한 것이다. 



  아내는 아가와 함께 거실 바닥에 누워, 아가에게 책을 보여주며 놀고 있었다. 당시 나는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닐 때였다. 안방구석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였던가, 거실에서 아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고 이내 아가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아가 얼굴 앞에서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린 것이다. 엄마 손에서 떨어진 책의 모서리가 아가의 눈 밑을 찧었고, 아가의 하얀 피부가 금세 퍼런 멍으로 변해버렸다.



  거실로 달려 나가 보니, 엄마는 아가보다 더 놀란 얼굴로 아가를 안아 달래고 있었고, 아가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그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 역시 누구보다 많이 놀랐지만 내가 누구인가, 조종사 아빠 아니던가. 



  심호흡을 한 뒤, 차분한 마음으로, 전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눈을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라고, "멍든 거야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것이다"라며 아내와 아가를 다독였다. 씩씩한 아가도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울음을 그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뚱한 표정의 아가로 돌아왔다. 아내와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가의 멍든 얼굴을 바라보며 그동안 잊고 지냈던 팔뚝과 눈썹에 난 상처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상처를 바라보며 오랜 시간 애를 태웠을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우리 아가보다 더 많이 울었겠지? 우는 나를 달래며 우리 엄마, 아빠는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심하게 자책하셨겠지?' 



  그날 저녁,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보았다. 잊고 지냈던 상처의 사연이 궁금해서, 그리고 쓰린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  



  부모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을 기억해 주는 이가 아닌가 싶다. 훗날, 아가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아빠는 오늘도 쓰린 마음을 달래며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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