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하면 생각나는 몇 가지가 있었다. 친척들이 왁자지껄하게 노니는 소리, 마당을 나서면 넓은 들판을 볼 수 있었던 따뜻하고 정다운 시골집, 그리고 외할머니의 손맛이 담긴 고깃국과 물김치 등등. 하지만 언젠가부터 명절이면 떠올리던 것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자연스레 명절은 여러 휴일 중에 그저 조금 더 긴 휴일이 되어버렸다.
왜 명절의 모습이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리던 사촌들의 머리가 커져가면서 점차 명절 대열의 분열이 생겼을 것이고, 손님이었던 입장에서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입장이 된 삼촌, 숙모, 이모, 이모부의 상황 또한 무시 못할 요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명절의 구심점이 되어 주셨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부재로 더 이상 옹기종기 모여 앉을 시골집이 없어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올해도 어김없이 명절이 돌아왔지만, 이번 명절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명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느새 나도 자녀를 품에 안은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가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저 자녀로서, 손주로서, 사위로서의 역할만 생각했다. 나만 잘 처신하면, 내 아내만 잘 챙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가가 태어나면서부터 고려해야 할 관계가 매우 많아졌다. 아기의 조부모, 아기의 외조부모, 아기의 이모·이모부, 아기의 삼촌, 아기의 큰아빠·큰엄마, 아기의 증조부모까지. 그리고 그 가운데 끼어있는 나... 혼란하다 혼란해 @_@;;
명절의 험난함은 집을 떠나기 전날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 아가와 외출했던 곳은 기껏해야 차로 30분 남짓한 거리. 아가의 조부모 댁까지는 평소 차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명절 연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동 시간은 얼마나 더 늘어날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출발하기 전날, 짐을 바리바리 챙기는데 옷, 기저귀, 장난감은 물론, 바운서, 유모차, 분유 포트까지 어휴... 반나절 집을 나서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서야!
하지만 짐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처음으로 아가와 함께 부모님 댁을 방문할 생각에 들뜬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특히 이번에는 그동안 찾아뵙지 못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댁도 들를 계획이었다. 나에게는 조부모님이지만 아가에게 증조부모님이라고 생각하니, 시간과 세월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길은 막히지 않았다. 순둥순둥한 아가는 오가는 길 위에서도, 오랜만에 만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도 그리고 난생처음 뵙는 왕할아버지, 왕할머니를 뵙는 자리에서도 울지 않았다. (하지만 웃지도 않았다... 도대체 언제쯤 까르르 웃어주는 거니... ㅠ)
아가는 그저 바운서에 앉아 자기 발가락을 만지작만지작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가를 바라보는 여러 어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아가에게만 향해 있었고, 밥을 먹을 때도 과일을 먹을 때도 연신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가였다.
이튿날 방문한 아가의 외갓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가는 그저 바닥에 누워 버둥거리기 바빴지만, 아가를 둘러싼 어른들은 연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가를 향한 재롱을 이어갔다. 항상 아가를 신경 쓰느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몰랐는데, 육아 경력자들이 모인 자리라서 그런지 오랜만에 집밥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길 것 같았던 3일간의 추석 연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복잡시러운 명절은 건너뛰고, 조금 더 아가가 큰 다음에 할아버지, 할머니댁을 방문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대로 하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 건조하게만 느껴지던 명절의 풍경이, 아가 덕분에 촉촉하고 따뜻하고 풍성해진 느낌이다. 아마 명절 기간 동안 아가를 곁에 두었던 양가 친척들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으리라 짐작해 본다.
아가를 낳고 기르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시간과 노력, 실질적인 비용뿐만 아니라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까지, 치러야 하는 대가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 아니겠는가?
아가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의 모든 아기를 '외계인' 보듯 했다. 조카를 포함한 그 어떤 아기도 안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기를 마주하는 것을 거부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가를 낳고 기르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고된 연휴를 보낸 아가는 천사 같은 얼굴로 곤히 자고 있다. 명절 기간 내내 아가 주위를 맴돌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떠올리며, '아가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이 분명하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일은 더 많이 많이 사랑해 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