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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장 Mar 12. 2024

오늘 하루, 자유 아빠! (37)



  지난 토요일 아침, 하루의 시작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 굴러다니는 아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쉬야로 빵빵해진 아가의 기저귀를 갈아준 뒤, 아가에게 맘마를 먹였다. 하지만 아가가 맘마를 다 먹어갈 때즘부터 아빠는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움직여야 했다. 



  아가가 맘마를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아빠는 엄마에게 아가를 토스(toss)한 뒤 서둘러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아가의 병원 진료, 가족행사 등의 이유로 아가를 먹이고 입히며 부리나케 외출 준비를 해본 적은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유로 외출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육아 아빠'에서 '자유 아빠'로 변신하여, 09시 12분에 출발하는 지하철을 타야만 했기 때문이다.



  육아 아빠는 항상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외출을 준비해야 한다. 언제, 어떻게, 어떤 돌발 변수가 생길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가가 평소 일어나야 하는 시간인데도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느라 정신을 못 차린다던지, 늘 꿀꺽꿀꺽 잘만 먹던 맘마를 갑자기 거부한다던지, 옷을 다 입혀놓았는데 불쑥 응가를 한다던지 등등의 사고(事故)를 논할 수 있겠다. 



  현실은 언제나 계획과 예상, 기대를 조금씩 벗어난다지만 육아하는 삶에서는 그 정도가 조금 더 심한 것 같다. 만약을 대비한다고 하지만,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은 '만약을 대비한 상황'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의 예상 밖 상황은 아가의 늦잠과 아빠의 늦잠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떻게든 계획된 시간에 지하철을 타야만 했다. 혹시나 그 열차를 놓치게 되어 다음 열차를 타게 되면, 모임 시간에 한참 늦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아하는 아빠에게 치장은 사치와도 같다. 육아의 세계는 1분, 1초가 급박하고 치열한 전투의 현장과도 같다. 이러한 육아의 세계에서 아빠에게 허락된 외출 준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수개월간의 전투 경험 덕분인지, 이제 아빠가 외출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채 5분을 넘지 않는다. 세수, 양치, 로션, 모자, 운동복, 패딩이면 아빠는 완벽한 출동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자유 아빠'가 된 아빠에게는 약간의 사치가 필요했다. 아니,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츄리닝 차림으로 근사한 음식점에 들어서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치를 부리는 자유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며칠 전부터 틈틈이 시간을 저축해야만 했다. 무엇을 입고, 신고, 챙겨야 하는지 미리미리 계획하면서 말이다. 물론 언제나 계획은 계획일 뿐... (지갑을 놓고 나오다니...!)



  외출복은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제시간에 출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옷을 주섬주섬 걸치는데 왠지 모를 불편함과 피곤함이 몰려오는 듯했다. 작년 겨울만 해도 잘 입고 다니던 옷들이었는데, 남의 옷을 얻어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 갈 길이 구만리가 남았는데, 출발도 전에 느껴지는 이 귀찮음은 무엇인가 싶었다. '그래도 가야지...' 누가 등 떠밀며 가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그렇게 엄마와 아가의 배웅을 받으면 집을 나섰다.



  지하철 역은 도보로 약 15분 거리였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아가를 키우면서부터 살게 된 집인데, 평소 외출 할 일이 전혀 없기도 했지만 외출을 하더라도 늘 차를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갈 일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지만, 막상 집을 나서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이른 아침 시간의 상쾌한 공기, 따스한 햇살 덕분이었을까? 역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점점 가볍고 경쾌해졌다. 



  모임 장소는 서울 중심가의 어느 식당이었다. 우리 집은 인천에서도 가장 외곽진 곳이었고, 이곳에서 모임 장소까지는 지하철로만 편도로 약 2시간이 소요되는 여정이었다. 왕복으로는 무려 4시간! 문득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을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외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머나먼 길을 다녀온 게 아닌가 싶다. 



  4시간을 지하철에 앉아있는 것이 꽤나 지루할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지루할 틈이 없었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가, 두꺼운 전공 서적을 들고 등교하는 대학생이 되었다가, 늦은 저녁까지 야근에 찌든 채 퇴근하는 직장인이 되기도 하였다. 하루 종일 집에만 갇혀 있는 육아 아빠에게,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과거의 나를 추억할 수 있게 해주는 타임머신이나 다름없었다. (지루한 육아 라이프를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엄마·아빠가 있다면 지하철 탑승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수시로 지도 앱을 들여다보며 열차 시간표, 빠른 환승 위치 등을 살피며 걷고 뛰다 보니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언제나 그랬듯 지인들과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평소와 다르게 '자유 아빠' 신분으로 모임에 참석해서 그런 것인지, 그 어느 때보다 1분 1초가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모임에 머물렀던 시간보다 지하철에 타있었던 시간이 더 많아서였을까? '이번 외출의 목적이 지하철을 타기 위한 것이었나'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고서야 귀가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내리니, 엄마와 아가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아가가 해맑게 웃는다. 아가의 미소를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하루 반나절 사이에 아가가 쑥 커버린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잠시나마 일탈을 누렸으니, 내일부터 다시 본업에 충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자유 아빠 끝! 육아 아빠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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