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동차마다 두툼한 지도책이 꼭 한 부씩은 놓여있던 시절이 있었다. 내 기억 속에도 아버지의 차 안 구석 어딘가에 두꺼운 지도책이 자리 잡고 있었던 장면이 남아 있다. 가족끼리 먼 길을 갈 때마다 이따금씩 지도책을 들춰보며 이동시간의 지루함을 달랬던 기억도 떠오른다.
당시만 해도, 아마 지도책을 수십 번 접었다 펼쳤다를 반복해야만 겨우겨우 낯선 목적지에 다다랐을 것이다. 동승자가 있다면 그가 지도를 보며 말해주는 방향과 이정표를 참고하며 운전을 했을 것이고, 만약 동승자가 없다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지도를 펴 들었을 것이다. 물론 동승자가 있다고 해서 운전 길이 편하리라는 보장은 없었을 것이다. 동승자와 다투지만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을 수도.
하지만 지금은 '지도책이 웬 말인가' 싶은 시대이다. 아무리 먼 거리를 가야 한다 하더라도 길 찾기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미리부터 지도책을 펼쳐놓고 '공부'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운전석에 앉아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한 뒤,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대로 열심히 핸들을 꺾기만 하면 어느샌가 목적지에 도착! 심지어 예상 도착 시간까지 정확하게 알려주기도!
혹여나 운전자가 운전 미숙으로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내비게이션은 금세 새로운 길을 찾아서 알려준다. 몇 번이고 운전자가 경로에서 벗어나더라도 내비게이션은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를 이어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련 기술은 점점 정교해졌고, 그에 비례하여 내비게이션 프로그램은 더욱더 정확해졌다. 자연스레 지도책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평생 손에 지도를 들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이따금씩 스마트폰 안의 지도 애플리케이션만 들여다보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지도를 떠올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조종사 교육을 마치고 출근한 첫날, 나에게 주어진 첫 업무가 바로 '지도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정말 '지도책이 웬 말인가' 싶었다.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헬리콥터를 조종하는 조종사에게 지도라니?
선배 조종사의 지도(指導) 하에 열심히 지도(地圖)를 접었다. 커다란 지도를 이리 접고 저리 접으면 작은 소책자 형태가 된 지도를 손에 들 수 있었다. 선배 조종사의 말에 의하면, 지도를 잘 접어두면 보관이나 운반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항법 연구를 할 때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 조종사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선배님? 항법 연구요?"라고 깜짝 놀라 물었다. 선배 조종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도 보고 공부해야지 ㅇ_ㅇ" 그랬다! 헬리콥터 조종사에게 지도란 '교과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함께 임무를 다녔던 선배들 대부분은 그야말로 '인간 내비게이션'이었다. 이 산은 무슨 산이고, 이 산 뒤에는 무슨 산이 있고, 여기 강을 따라가다가 두 번째 능선에서 우측으로 꺾으면 무엇이 있으며, 저기 고압선은 높이가 어떻게 되고, 이 기지에 착륙할 때는 요 사거리를 밟고 선회하는 게 유리하고... 등등등. 선배들은 조종석에 앉으면 눈에 들어오는 지표면의 온갖 것들에 대한 정보를 쏟아냈다. 마치 고장 난 내비게이션처럼...?
지금 내가 조종하는 헬리콥터는 최신 기종이다. 사실, 최신 기종 헬리콥터에는 대부분 전자 지도와 내비게이션 장비가 탑재되어 있다. 그 말인즉슨, 임무 전에 열심히 지도를 들여다보며 항법 연구를 할 필요도, 비행 가방에 무겁고 두꺼운 지도책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 세대 위의 선배 조종사들이 주로 조종했던 헬리콥터에는 전자 지도도, 내비게이션 장비도 없었다. 그 시절 조종사가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해 의지할 데라고는 비행 전이나, 비행 중이나 오직 '지도'뿐이었다.
선배 조종사들은 임무가 주어지면 밤이 새도록 지도를 붙잡고 씨름을 했다고 한다. 눈을 감으면 2차원 평면에 그려진 산이며 골짜기며 건물이며 도로들이 3차원의 모습으로 떠오를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선배 조종사들은 시간과 노력, 경험을 쌓으며 인간 내비게이션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지도책을 접을 때까지만 해도 지도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임무를 다니면서도 '조종석 디지털 화면에 전자 지도를 떡 하니 펼쳐놓을 수 있는데, 무엇하러 지도 보느라 시간을 허비하나' 싶은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지도를 훑고 있는 선배들 눈치를 보느라 차마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산의 8부 능선을 넘어서, 이 강의 어느 부분을 끼고 돌아서, 이 고속도로를 따라 얼마간 이동하다가, 여기서 저 큰 건물을 참고점으로 삼아 어느 방향으로 가다 보면..."이라고 중얼중얼거리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고, 어느 새부터 그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수없이 산과 들의 풍경을, 강과 도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임무를 준비하다 보니, 전국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조종간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자 지도와 내비게이션 장치에 의존했다면 누릴 수 없었을 '침착함'과 '여유'라는 '덤'과 함께.
그러나 안타깝게도, 육아하는 아빠에게는 교과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조종사에게는 가야 할 곳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고, 그곳을 가기 위한 명확한 길이 존재한다. 심지어 '지도'라는 교과서도 있으니, 그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면 어렵지 않게 임무를 완수한 뒤, 성취감이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육아하는 아빠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흐리멍덩해 보이기만 하다.
지금 아가가 졸려하는 게 맞는 것인지, 배고파하는 게 맞는 것인지, 좋아서 웃는 것인지 어이없어서 웃는 것인지, 지금 시기에 이유식을 세끼 먹이는 게 맞는 것인지, 추운 날씨인데 데리고 나가도 되는 것인지, 방바닥을 기어 다니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혼자 놀게 해도 되는 것인지 등등. 그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산이 아닌가 벼...'를 반복하기 일쑤...
확신이 없으니 모든 결정에 자신이 없고, 자신이 없으니 당연히 자신감이 생길 리 만무. 침착함과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언제나 간절한 희망 사항일 뿐. 언제쯤 육아 세계의 뿌연 안개가 걷힐지, 과연 그날이 오기는 하는 것인지, 하루하루가 노심초사, 답답한 마음만 가득하다.
하지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는 법! 초보 아빠는 그저 한 치 앞을 조심스레 더듬으며 나아갈 뿐이다. 오늘도 무탈한 하루를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