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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경록 Mar 25. 2022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영화)

"아! 사랑의 덧없음이여!"


"아! 사랑의 덧없음이여!"


네덜란드의 바로크 시대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누끼따기 좋은 프로필 사진 스타일로 배경은 검다.


빛의 시대인 바로크 시대 작품처럼, 빛이 11시 방향에서 온화하게 한 소녀를 감싼다. 파란색 터번을 쓴 소녀의 손에는 테니스 라켓이나 전자기타가 쥐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도 머리에 슬로건이나 두건을 많이 착용하는데 꽤나 쓰임새가 좋다. 운동할 때나 로큰롤 공연을 할 때 땀이 눈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방어할 수 있다. 선크림이나 메이크업 국물이 눈에 들어와 세상이 스푸마토 기법처럼 뿌옇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국물 덕분에 눈이 따가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면 괜스레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머리에 두른 슬로건은 화장실에서 손을 닦을 수도 있고,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지면 목에 스카프처럼 두를 수도 있다. 또 요리를 할 때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을 방어할 수 있는 청결함을 유지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푸른 터번 덕분에 이 소녀는 이국적인 (집시 같은) 느낌을 준다.


이 그림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진주보다도 하얀 계란 프라이 흰자같이 빛나는 하얀 눈동자이다. 가슴 설레게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눈썹은 있는 듯 없는 듯 경계가 없는 맑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빛을 받아 더욱 하얀 피부에 촉촉한 붉은 입술, 이 빛깔은 이 소녀처럼 싱그러운 오전의 빛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눈빛을 닮은 진주 귀걸이.


아니 그녀의 눈빛이 진주 귀걸이를 닮았을까?



흘러내린 머리끈과 진주 귀걸이는 우아한 중력이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소녀는 중력을 이기고 나온 나무처럼 싱그럽다.



모나리자와 닮은 구석이 있다. 경계가 명확하기보단 부드럽다.


색감도 따뜻한 햇살과 만나 온유한 느낌을 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빛이 훑고 지나가며 시간이 흐를 것만 같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영화를 보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의 덧없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시

데이비스 표정이  맺힌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영화 리뷰를 쓰는 이유도 마리아 틴스를 연기한 에시 데이비스 때문이다.



그저 사랑받길 원했다.


그녀의 질투도 한스러운 절규도... 나에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보다 더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하녀와 (정신적으로) 바람난 화가와 어렴풋이 미묘한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버린 어린 하녀, 그림의 구도를 완성하기 위해 진주 귀걸이를 뚫게 된다. 야한 장면은 안 나오지만 어떤 영화보다도 섹슈얼 한 영화이다.


그래서 더 슬프다.


사랑받길 원한 화가의 아내 (마리아)도 그 느낌을 눈치채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작품을 본 마리아는


"너무 외설적이잖아."라고 울부짖으며 그림을 찢어 버리려 한다.



"왜 나는 그려주지 않냐고..."




이 장면에서 사랑의 덧없음을 느꼈다.


정신적으로 바람피운 남녀를 욕할 수는 없었다.


그들 사이엔 어쩔 수 없이 피어난 사랑이었으니...



악역은 돈 많은 귀족 후원자 밖에 없으며,


다른 캐릭터 들은 밉지 않고 왠지 설득력이 있었다.



우린 연약한 인간이지 않나...



예술이란 그런 인간의 연약하고 아름다운 물감을 세상에 칠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가 신비로운 점은 묘하게 사랑에 빠지는데, 대사가 별로 없다.


아니 말이 필요 없다. 아름다운 장면들과 눈빛으로 표현한다.


마치 그림처럼...



글을 써 놓고 보니 다시 보고 싶다.


그리운 옛 추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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