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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우 김윤후 Jun 26. 2019

절실함이라는 무기

절실함이라는 무기

고교시절 학업 스트레스를 잊게 해 주던 개그 프로그램 방송이 있었다. 나는 방송 다음날 학급 친구들과 재미있었던 코너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특정 개그맨들의 성대모사를 할 정도로 그 프로그램 애청자였다. 덕분에 반에서 끼가 있는 학급생으로 분류가 되어 분위기 메이커로 인정받곤 했다. 그들을 흉내 내면서도 매주 새로운 소재로 방송을 하는 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나도 개그맨이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들을 동경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학로에서 첫 번째 작품을 끝마치고 다른 작품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쯤이었다. 유난히도 덥던 여름이었는데 난 다시 무대에 서기 위해 닥치는 대로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번번이 불합격 문자를 확인하면서도 내 마음은 뜨거웠다.

뮤지컬 우연히 행복해지다(2015)

 그러던 어느 월요일, 그날도 오디션 하나를 보고 아르바이트 시간까지 시간이 비어서 낙산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을 향하는 가파른 언덕과 수많은 계단을 걸어올라 공원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 도착해 대학로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망쳐버린 오디션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떨었을까. A4 용지 속 다섯 줄 정도의 지정대사를 버벅거리며 심사위원들 앞에서 얼어 버렸던 그 순간들이 떠오르며 무력함을 느꼈다.

  '나는 재능이 없는 건가'

  그럼에도 내 눈 앞에 펼쳐진 대학로에 밀집한 수많은 극장들을 보며 저곳에 있는 모든 무대에 설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애써 다짐했다.

  다음에는 잘하자는 마음으로 깊게 심호흡을 한 후에 낮잠을 자기 위해 이어폰을 끼고 팔각정 마루에 누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르바이트를 가려고 일어나는데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원했던 다른 오디션에 관련된 전화임을 직감하고 태연한 척 전화를 받았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극장으로 올 수 있습니까?"

  지금 당장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전화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디션을 보고 나면 정시에 아르바이트하는 곳까지 도착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 사장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지만 바쁜 시간대이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해서 안 된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지금 바로 아르바이트를 가지 않으면 불같은 사장님 성격에 날 자를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까지 수입이 없어 공연을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내 몫까지 열심히 해라.'

  망설이는 순간 문득 전 작품 때 같이 연습을 하다 지금은 호스트바에서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술을 마시면서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저 일 그만두겠습니다." 

  아르바이트 사장에게 전화를 하고 극장 측에서 문자로 보낸 약도를 보면서 무작정 달렸다. 낙산의 내리막을 달려가는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나에게 힘내라고 내 등을 밀어주는 것 같았다.

  극장 건물에 도착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다고 주문을 걸었다. 텅 빈 극장엔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혼자 앉아 있었다.

  "무대로!"

  대표는 대충 눈인사를 한 후에 손으로 무대 쪽을 가리켰다.

  무대 위에는 무선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나는 텅 빈 극장의 고요함 속에서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무대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들었지만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대표는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를 부르고 그 후에 자기소개를 하라는 주문을 했다. 

  그런데 대표 혼자 있는 줄 알았던 극장에 오퍼를 보는 사람이 있었다. 음악을 틀겠다는 오퍼의 말과 동시에 반주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가족들과 여행을 갈 때 차 안에서 아버지가 틀어주셨던 수많은 조용필 노래 중에 『여행을 떠나요』가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가사의 반절은 즉흥으로 지어냈고 하이라이트 부분은 알고 있는 대로 불렀다. 노래를 마치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자기소개를 했다. 나이와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 대표가 입을 열었다.

  “합격!”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퍼를 보는 사람에게 나를 떠넘기고 극장 밖으로 나갔다.  감사하다는 말은커녕 자기소개도 끝내지 못한 나는 전입신고를 앞둔 이등병처럼 불안한 심정으로 무대에 서 있었다. 경력이 한 줄 밖에 안 되는 배우가 하기에는 인기가 많은 공연이어서 나로서는 놀랍고 합격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스물다섯 살 풋내기 배우였던 나에겐 대표라는 사람이 워낙 어려워서 평소에 물어보지 못하다가 군 입대 전 쫑파티를 할 때 술김에 용기를 내어서 뽑힌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곧바로 달려온다고 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그 이유로 내가 합격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풋내기 배우에게 가장 큰 무기는 어쩌면 절실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퍼의 안내를 받으며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은 내가 전에 했던 작품의 배우 대기실보다 네 배도 넘게 큰 공간이었다. 그만큼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각자 분주해 보였다. 고요한  무대와 대조되는 곳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이들도 내 노래를 다 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쑥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한 건 대기실에 있는 모두가 굉장히 낯이 익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내가 고교시절에 애청했던 개그 프로그램에 나왔던 그 개그맨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한 영국 영화배우를 닮은 개그맨은 내가 정말 좋아했던 연예인이었다. 그가 내 눈앞에서 소파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아이패드로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기합을 넣어 큰소리로 인사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나를 쳐다봤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게임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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