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다단계 사건 이후로 나는 알바를 그만두고 오디션 준비에만 열중했다. 하루라도 빨리 무대에 서서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자칫 잘못하면 나도 그 후배처럼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외줄 타기를 하는 광대처럼 배우로서 중심을 잘 잡고 오직 한 길을 가리라 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했다.
오디션을 지원하고, 지정대사를 외우고, 오디션을 보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탈락의 고배를 마실 때마다 좌절감이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탈락을 거듭할수록 내성이 생겨서 실망감보다는 다음 오디션을 더 열심히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심사위원들 앞에서 서는 것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심사위원들의 표정만으로도 결과를 예감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을 때쯤, 운 좋게 한 컴퍼니로부터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상업성이 많이 짙은 작품이어서 조금 망설여졌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다. 컴퍼니에선 연출과 미팅을 하기 전에 작품을 먼저 관람하라고 했다.
지정된 시각에 관람을 하러 극장에 도착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아이돌의 콘서트의 입장을 기다리는 소녀들처럼 손에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이 카메라로 그 모습을 담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아마 홍보를 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 것 같았다. 나는 극장으로 들어가 여성 관객들 속에 앉아 집중해서 공연을 관람했다. 상업극 치고는 상당히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는데 배우들의 외모가 출중했다. 공연이 끝나고 여성 관객들의 환호성 속에서 함께 박수를 치며 내가 이 작품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난 너 믿는다."
연출은 배우를 믿는 것이 자신의 철학이라며 대본을 주더니 보름 안에는 대사를 다 외워야 한다고 했다. 대사가 꽤 많아 대본이 두꺼웠지만 해내고 싶었다.
그때 한 남자 배우가 들어왔다. 연출은 내가 지원한 배역을 맡아 현재 공연을 하고 있는 배우라고 그를 소개했다. 185센티미터 정도의 큰 키에 장발을 하고 짙은 콧수염을 기른 그는 작은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이 유도선수 출신이라고 했다. 나는 처음에 그가 나보다 열 살은 차이가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세 살 연상이었다. 연출은 온 김에 첫 연습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배역을 맡은 그 선배와 함께 셋이서 극장 밑 지하로 향했다. 놀랍게도 지하에 공연장이 또 있었다. 같은 작품을 동시에 두 개의 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인기가 많은 상업극이었다.
연출은 객석 구석에서 핸드폰으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고(아마도 게임), 나는 무대로 올라가 그 선배와 열심히 대본 리딩을 했다. 내가 지문을 읽을 때마다 그 선배는 '아니 그게 아니라'라고 하면서 어떤 감정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지를 일러주었다. 그리고는 항상 '이렇게 하는 거야'라는 말로 연기에 대한 정리를 했다.
“빨리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네가 잘 좀 가르쳐 줘.”
한참 후 연출이 다가와 선배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맡기고 약속이 있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오 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야, 네가 알아서 해. 연기는 자기가 깨달아야 되는 거야."
그 말을 하면서 선배가 무대를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연출이 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나는 텅 빈 극장의 무대 위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정말 세상에 쉬운 게 없구나.'
그러다가 문득 고독감을 느낄 시간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빨리 무대에 서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음껏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일 아침 일찍 극장으로 가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연극 대본을 읽으며 연습을 했다. 이틀 정도 지나자 연출이 조연출을 소개해 주었다. 자기 밑에서 연출을 배우고 있는, 혜화역 근처의 명문대학교를 졸업한 수재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다음 날부터 조연출에게서 작품을 분석하는 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해본 적이 없었던 작업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와 작품에 대해서 토론하고 연습했다. 덕분에 연기에 대한 자신감이 하루하루 쌓여 갔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새로운 배우가 들어왔다는 조연출 말에 경쟁자가 또 생긴 건 아닌지 내심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로 들어온 건 여배우였다. 본래에는 여장 남자가 맡는 배역이지만 이번엔 진짜로 여배우가 들어온 것이다.
작은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은 아니었지만 유난히도 짙은 빨간색 립스틱을 쓰는 것이 인상적인 배우였다. 가볍게 통성명을 하고 조연출과 셋이서 연습을 했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도 에너지가 넘쳤다. 나는 연출이 그녀를 왜 뽑았는지 알 것 같았다.
연습이 끝나고 그녀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서 상경했으며 현재는 인천에서 고향 선배와 같이 살고 있었다. 오전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는 행사를 뛴다고 했다. 사는 게 힘들다면서도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경력은 많지 않았지만 재능이 있어서 전도가 유망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연출과 그녀 그리고 나는 지하에 있는 극장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작품에 대한 토론을 했다. 토론이 끝나면 조연출은 컴퍼니 대표에게 기획 일을 배우러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때부터는 여배우와 둘이서 무대 위에 올라 연습을 했다. 항상 저녁이 돼서야 연습이 끝났지만 피곤하기보다는 서로가 하루하루 연기 실력이 늘어가는 것이 기뻤다.
극장을 나와 집으로 갈 때는 살아왔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고생이 많았다며 위로해 주기도 했지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더 힘들었다고 우기며 돌아가는 날도 많았다.
"수고했다."
“내일 봐, 오빠. 우리 꼭 성공하자."
'성공하자'는 말이 공식 구호가 된 것처럼 우리는 항상 그 말을 주고받으며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보름 정도를 오전에 나와 저녁까지 연습을 하는 패턴이 반복되던 어느 날, 극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연출이 새롭게 들어온 배우 세 명을 소개했다. 근래에 오디션을 개최하지 않아서 새로 들어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연출 뒤에 서 있는 조연출이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 명은 일본에서 아이돌을 하다가 온 배우 A와 드라마 쪽에서 활동을 하다가 온 배우 B, 그리고 영화 쪽에서 활동을 하다 온 배우 C였다. 그들은 각자 소속사가 있었고 공교롭게도 세명 모두 나와 동갑내기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A와 B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둘은 서로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던 것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배우로서 꼭 성공하겠습니다."
"여기가 밑바닥이냐?"
연출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순간 정적이 흐르면서 조연출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 역시도 대학로를 폄하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출이 불쾌해하는데 나까지 감정을 표출할 필요는 없었다.
영화를 하는 C는 자기소개보다는 본인이 현재 쇼핑몰을 운영한다며 핸드폰을 꺼내 홈페이지를 보여주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리고 직원가로 싸게 해 주겠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드라마를 했다는 B는 키가 크고 남자답게 생겼는데 본인이 연기를 못해서 대사 없는 호위무사 같은 역할만 했다고 했다. 그는 대학로 최고의 컴퍼니인 이곳에서 연기력을 쌓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우리는 그렇게 다섯이서 연습을 시작했다. 어느 날 연습이 끝났을 때 조연출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기획사 사장들이 연출과 술자리를 가지면서 그 세 사람을 작품에 캐스팅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기를 잘 못하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괜찮다는 말로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초조했다. 다들 키도 크고 잘생겼기 때문에 뭐 하나 내가 그들보다 나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흔들리지 말자고 스스로와 약속을 하며 연습을 했다.
세 명의 출석률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연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A와 C는 나를 포함한 기존에 있던 사람들과는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과 다르게 B는 선배들과의 술자리에도 자주 어울리며 꽤 친하게 지냈다. B는 내게도 몇 번이나 선배들과 같이 술자리를 하자고 권유했지만 나는 술을 즐겨하지 않아서 그때마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극장 앞에 스포츠카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차에 관심이 없는 나도 TV나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좋은 차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근처에 연예인이라도 왔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연습을 하러 지하에 있는 극장으로 내려갔다. 드라마를 하던 배우 B가 여배우와 함께 객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 앞에 차 봤어?"
나는 극장 앞에 세워진 스포츠카에 대한 이야기냐고 물었고 그녀는 신이 나서 B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연을 하러 온 다른 배우들까지도 그 차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한 배우는 연출이 소유하고 있는 두 대의 외제차를 합해도 그 차보다는 가격이 나가지 않을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차가 멋있다는 말로 B를 치켜세워 주었다.
그날 평소보다 연습을 일찍 끝내고 한강으로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본래는 이인승의 차이지만 뒤쪽에 쭈그리고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나는 뒷좌석에, 그녀는 조수석에 앉고, B는 운전대를 잡고 한강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음악을 크게 틀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한강으로 향했다.
한강에 도착한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저마다 감상에 젖어 있었다. 침묵을 깬 건 B였다. B는 A와 사이가 나쁜 이유들부터 자신은 인기 아이돌들이 소속되어 있는 축구팀에서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여러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여배우가 화장실에 간 사이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연기 취미로 하는 거야."
나는 한강을 보며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군수산업을 하고 있으며 얼마 후면 그 사업을 물려받을 계획이라고 했다. 배우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후회하기 싫어서 아직까지 그만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좋겠네."
그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억울했다. 운 좋게 서류심사를 통과해도 긴장감속에서 오디션을 보고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좌절감을 느끼며 지내온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무대에 선다는 것이 정말 절실하고 소중한데 어떤 이들에게는 이렇게 쉽고 가벼운 것이라니. 말로만 듣던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졌다.
돌아가는 길은 그 둘과 집 방향이 달라서 역 근처에서 내려 달라고 했다.
집에 가니 어머니가 치킨을 시켜 주셨다. 가족들과 좋아하는 양념치킨을 먹으면서 나는 나대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이랑 나를 비교하지 말자.'
그렇게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극장에 가보니 아이돌 출신 배우 A가 일찍 와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상대역을 연기해주면서 연습을 했다. 연습 후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일본에서 겪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말 그대로 밑바닥부터 시작했던 것 같았다. 자기소개를 할 때 '밑바닥부터'라는 말이 악의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가 되어 다 같이 연습을 하는데 갑자기 연출이 나타나 나에게 5시 공연 오프닝 멘트를 하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갑작스러웠다. 제대 후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 두렵고 떨렸다. 종이에 멘트를 할 내용을 적어 놓고 무작정 외우기 시작했다. 공연 시간이 임박하자 나는 적어놓은 종이를 꾸깃꾸깃 접어서 뒷주머니에 넣었다. 여차하면 꺼내서 볼 심산이었다. 동료 배우들은 할 수 있다며 응원해 주었다.
5시 정각, 나는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면서 무대 위로 뛰쳐나갔다. 늘 그랬듯이 극장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객이 많았다. 긴장되었지만 동료 배우들이 객석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어서 그나마 힘이 되었다.
용기를 내어 준비된 멘트를 내뱉기 시작했다. 말을 하면서도 쿵쾅거리는 내 심장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틀리지 말아야지.'
멘트를 하면서 나는 계속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런데 중간쯤 갔을 때 갑자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관객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호흡은 가빠오고 어지럽기 시작했다. 일 초 일 초가 일 년 같이 길게 느껴지는 순간,
"괜찮아! 침착해! 괜찮아! 침착해!"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관객 한 명이 큰소리로 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관객들도 똑같이 소리치면서 나를 응원해 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준비했던 멘트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관객들은 귀엽다며 박수를 쳐 주었지만 나는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리 몇 년 만에 사람들 앞에 섰기로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연출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처음 치고는 못했지만 다음번에는 더 잘하라고 했다. 울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오퍼실로 들어가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이 끝난 후 극장 앞에서 항상 같이 버스를 타러 가는 여배우를 기다렸다.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자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순간 빨간색 스포츠카가 눈앞에 나타났다. 드라마를 하는 B와 여배우가 그 차에 타고 있었다. 조수석 창문이 열리더니 B가 나에게 타라고 했다. 혜화역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나는 어차피 금방이니까 먼저 가겠다고 했다.
"내일 봐, 오빠. 우리 꼭 성공하자!"
그렇지만 스포츠카에 앉아 내게 구호를 외치는 그녀가 낯설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녀와 다르게 느껴졌다. 혼자 음악을 들으며 정류장으로 가고 있는데 평소와 같은 길임에도 그 길이 쓸쓸하고 더 어둡고 길게 느껴졌다. 마음이 무거웠고 나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 내가 배우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화도 났다.
‘내 길이 아닌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프닝 멘트를 할 때 '침착해'를 외쳤던 소녀였다. 편지를 건네면서 오프닝 때 내가 나와서 공연에도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아쉬웠다고 했다.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내가 공연하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고 말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와서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평온한 밤 보내세요."
“힘내세요.”
그녀의 응원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아 그녀의 편지를 읽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가방에 있는 편지지를 꺼내 쓴다며 오프닝 멘트 이후 공연에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다는, 아까 했던 말과 비슷한 내용의 편지였다. 그리 긴 내용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힘이 되는 한 글자 한 글자였다.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함을 느꼈다.
문득 배우를 꿈꾸며 교수님으로부터 전과 서류에 사인을 받던 게 그리스 신화의 나오는 판도라처럼 제우스에게 받은 상자를 열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미움, 고통, 질투 등등이 나를 힘들게 했지만 상자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희망을 생각하며 편지를 손에 꼭 쥐고 스스로를 달랬다. 지금 겪는 것들이 너무 괴롭지만, 어쩌면 그게 나를 더 강하게 해서 언젠가 훌륭한 배우로 만들어 주는 판도라(선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나는 희망을 담은 세상에서 가장 큰 차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원했다. 나를 비롯한 이 훌륭한 슈퍼카에 타고 있는 젊은 청춘들을 위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