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맨
그곳에 가면 항상 나보다 조연출이 먼저 와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공식 연습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오는 나보다 삼십 분 정도 더 일찍 와서 청소를 하는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만 아니면 두 시간 먼저 가서 청소를 해 놓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항상 커피를 사들고 극장으로 갔다. 그때마다 그는 멋쩍은 웃음으로 커피를 건네받으며 이런 걸 왜 사 오느냐고 말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무리 청소를 돕고 나서 함께 연기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을 하다가 명문대생인 그에게 조연출이 된 이유를 물었다. 그는 배우가 꿈이었지만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연출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너무 부럽고 대단한 것 같다는 그의 표정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그에게 지금은 우리가 경력도 없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한 연출가와 배우가 되자고 했다. 그러자 그는 표정이 밝아지더니 나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 에너지가 넘치는 배우라며 나중에 같이 일을 하게 되면 좋겠다고 했다.
정식 연습시간이 되자 영화를 하던 C가 왔고 10분 정도 지나서 여배우가 도착했다. 조연출은 오늘 연습 인원이 이게 다,라고 하면서 오늘은 유난히도 출석률이 낮다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대본을 보지 않고 중간까지 배역을 바꿔 가면서 연습을 했다. 두 번 정도 반복하고 나니 한 시간 가량 흘렀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나는 식권을 받으러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엔 연출이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고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연습 잘하고 있지? 열심히 해! 밥은 주잖아!"
연출은 오늘은 출석률이 왜 이렇게 저조하냐면서 불시에 보러 갈 테니 연습을 열심히 하라고 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식권을 받아가지고 나왔다.
극장 앞에 있는 나무 밑 그늘에서 조연출과 C, 그리고 여배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C는 스케줄이 있어서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식권은 우리가 사용해도 좋다면서.
덕분에 반계탕을 하나 더 시킨 우리는 다른 날보다 더 풍요롭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여배우에게 B의 근황을 물었다. 회사 사정상 그가 출연할 공연 일자가 앞당겨져 첫 공연이 내일인데도 요즘 연습에 잘 참여하지 않았다. 공연 전날인 오늘까지도.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잘 모르겠어..."
그녀의 대답에 희미한 슬픔이 느껴졌다. 나는 조연출에게 C가 하는 쇼핑몰의 옷들이 예쁘다고 화제를 돌렸다. 판매가의 50프로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C의 말을 덧붙이며. 그리고 핸드폰으로 홈페이지에 들어가 조연출과 나는 서로에게 어울리는 옷들을 추천했다. 식사 후 커피를 한 손에 들고 극장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른한 오후였다. 나와 조연출은 비흡연자였지만 흡연자인 그녀를 위해 흡연 장소인 극장 뒤편으로 갔다.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지하극장 후문 앞에 쌓인 모래주머니에 앉아 앞에 서 있는 조연출과 오후 연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비어 있는 C의 배역은 자신이 맡고 처음부터 연습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에게 오늘을 계기로 배우로 복귀하는 게 아니냐고 하면서 낄낄거렸다.
"맥주 한 잔 할래요?"
편의점으로 가면서 그녀와 나는 대학교 때 술을 마시고 연습했던 기억들을 주고받았다. 이공계 출신인 조연출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대화를 관심 있게 들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연습을 하고 있는 작품을 했던 배우 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로 공연을 하다가 망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연출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잘랐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잠시 숙연해졌다.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 음악소리가 들렸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작은 클래식 음악회를 하고 있었다. 맥주는 내가 살 테니 그들에게 좋은 자리를 잡아 놓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녀는 빨리 오라고 하고는 신이 나서 조연출을 끌고 마로니에 공원으로 달려갔다. 나는 혹시 몰라서 넉넉하게 맥주 다섯 캔을 샀다. 조연출과 여배우의 몫 각 두 캔과 나의 몫 한 캔이었다.
마로니에 공원으로 가니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자리에 그들이 앉아 있었다. 맥주 두 캔씩을 건네자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센스가 있다고 내게 말했다. 곧바로 캔을 깐 나는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과거 마로니에 공원에서 홀로 연습하던 때가 떠오르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대비되었다. 라이브로 연주하고 있는 클래식 음악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공연을 보며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연인들과 사이좋아 보이는 가족들.
"아빠, 음악 제목 뭐야?"
옆에서 아빠의 어깨에 목마를 탄 채 공연을 보고 있던 아이가 물었다.
"모르겠네, 엄마한테 물어봐."
아빠의 대답에 엄마도 아이의 시선을 피했다. 아이를 위해 내가 그들 대신 대답했다.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이라는 곡이야."
클래식에 깊은 조예는 없지만 사티 1번과 그 곡을 좋아하던 나는 평소 자주 듣지 못했던 그 곡이 흘러나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내 옆에서 모든 걸 잊고 맥주를 마시며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는 동료들도 그 순간만큼은.
남아 있는 맥주를 버리긴 아깝지 않느냐며 우리는 각자 맥주캔을 들고 지하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에 도착해서 나는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다 마신 후 몸을 풀면서 연습 준비를 했다.
"오빠,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그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술이 약한 내가 오랜만에 맥주를 마셔서 얼굴이 붉어진 모양이었다.
"많이 빨개?"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웃고만 있었다. 조연출은 내가 술자리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눈이 풀리고 눈 주변도 빨개졌으니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화장실에 가려는데,
"연습 잘들 하고 있냐? 한번 볼까?"
평소에 워커를 신고 다니는 연출이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순간, 조연출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내게 무대 뒤편에 있는 비상구를 가르치며 복화술로 도망치라고 했다. 나는 놀랐지만 재빠르게 비상구 문을 열고 숨었다.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연출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연출은 조연출과 여배우에게 밥 잘 먹었느냐는 질문을 하다가 여기서 술을 마셨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맥주캔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조연출은 밖에서 마시고 남은 것을 들고 왔다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연출은 왜 술을 마셨냐고 계속 따졌고 조연출도 배우의 한계를 끌어내기 위해서 술을 마시게 했다고 응수했다. 그 말에 연출은 연습이 장난이냐며 대표의 소개로 들어온 게 아니었다면 잘라 버렸을 거라며 언성을 높였다.
연출은 극장이 개판이라며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오전 연습을 끝내고 정리를 말끔히 하지 않고 밥을 먹으러 갔던 것이다. 연출은 워커를 바닥에 끌며 극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도 정리하고.”
“이거 치우고.”
“여긴 왜 이렇게 더러워?”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내게 가까워졌다. 무대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극장 뒤편에 있는 문으로 올라가는 복도식 계단이었다. 다행히도 천장이 플라스틱으로 된 투명 유리여서 어둡진 않았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가 가득하고 전에 썼던 공연 포스터들이 내 허리 높이만큼 쌓여 있었다. 공연 포스터와 함께 널려 있는 잡동사니들이 퀴퀴한 냄새를 풍겼고 계단 끝 뒷문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담배냄새가 역했다.
아까보다 연출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바로 내가 서 있는 문 너머까지 온 것 같았다. 나는 신발을 벗어 양손에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잡동사니들을 헤치며 계단을 올라가 뒷문 손잡이의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철로 된 문이어서 무겁기도 했겠지만 문 앞에 무언가로 인해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순간 사람들이 담배를 피울 때 앉아 있던 모래주머니들이 문 앞에 쌓여 있었던 게 떠올랐다.
"비상 통로도 청소하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왜 아직도 안 됐지? 극장장 이건 뭐하는 놈이야?"
연출의 성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다시 신발을 신고 더 힘을 실어서 문을 밀었다. 조금씩 반응이 오는데 밑에 있는 비상계단 문이 열렸다.
연출이 먼지 때문에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열린 문 앞에서 고함을 쳤다. 나는 전력을 다해 사람 한 명 정도 나갈 수 있는 틈을 겨우 만들어 밖으로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 몸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돼 있었다. 옆 건물 주차장 관리 요원 아저씨가 파라솔 그늘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목례를 한 후 무너져 내린 몇 개의 모래 포대를 다시 쌓아 놓았다. 모래 포대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는데 뒤에서 문을 열려고 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거 왜 안 열려? 불나면 어쩌려고 그래?"
등 뒤에서 연출의 성질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모래포대에 앉아 문이 열리지 않게 힘을 주었다. 몇 번 문을 열려고 시도하던 연출은 결국 포기하고는 개판이네, 하고 투덜대며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한참 동안 문에 귀를 대고 그가 완전히 내려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연출이 열리지 않는 뒷문을 확인하러 금방이라도 이곳으로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버릴까 생각을 했지만 가방과 핸드폰을 지하 극장에 두고 와서 그럴 수도 없었다. 옆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 숨어서 창문으로 연출이 뒷문으로 언제 오는지를 지켜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조연출과 여배우가 뒷문 근처로 나타났다. 나는 창문을 열고 조용히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내 목소리에 두리번거리다 이층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웃으면서 빨리 내려오라고 했다.
"어떻게 안 걸린 거예요? 거기서 어떻게 나왔어요?"
조연출이 내 가방과 휴대폰을 건네며 물었다.
"간절하게 바라면 뭐든 이루어지는 법이에요"
내 말에 조연출은 의아한 표정으로 계속 묻다가 내가 알려주지 않을 것 같자 연출이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전했다. 고생했다는 인사를 하고 조연출은 사무실로 올라갔고 나와 여배우는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다음날, B의 첫 공연을 보러 갔다. 관객 중 관계자는 나와 여배우뿐 아이돌 출신 A와 영화배우 C는 관람석에 없었다. 그들은 지하 극장에서 조연출과 연습을 하고 있었다. B는 연습에 참여를 많이 하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지만 전부터 하고 있던 다른 배우들이 잘 받쳐 주었다. 그런데 내가 놀랐던 것은 B가 몇 번 대사를 까먹었을 땐 '제 대사가 뭐였죠?'라고 상대방 배우들게 물어보면서 위기에 대처하며 무사하게 넘어갔던 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 모습이 불편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얼마 전 바람잡이를 하면서 실수를 했던 나를 떠올리면서 그의 그런 여유가 부러웠다.
공연이 끝나고 나와 여배우는 그를 축하해주러 갔다. 그리고 실수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게 여유 있게 연기를 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그냥 막 해, 별거 없어."
B는 연기를 취미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담감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편하게 연기를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날은 한동안 그랬던 것처럼 혼자 버스를 탔다. 여배우는 B와 함께 집으로 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제는 그녀와 외치던 구호를 듣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B가 그만둘 거라는 얘기를 조연출에게서 들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집안일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배우도 연습 참여가 뜸해지더니 작품을 그만두었다. 그러면서 내게 메신저로 이젠 배우 일을 그만 하겠다며 함께 연습하던 시간들이 즐거웠다는 연락을 보냈다.
'성공하자, 오빠'
마지막 문장은 늘 정류장에서 외치던 그 구호였다.
그 둘이 없어도 남아 있는 사람들은 묵묵히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동안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떠난 그들의 빈자리가 크지 않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첫 공연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그날은 아무도 없이 혼자 연습을 하고 있었다. 조연출이 없었지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오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지하 극장에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는데 조연출이 잔뜩 취해서 내 앞에 나타났다.
"저. 여기 그만둡니다."
항상 올곧고 단정하던 사람이 이렇게 흐트러져서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그만둔다는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이유를 물었다. 그는 내 눈을 피하며 땅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기가 힘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는 자기 입으로는 말을 할 수가 없다며 연출에게서 곧 연락이 올 거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게 객석에 앉아서 쉬고 있으라고 하고 이층에 있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다른 직원들은 퇴근하고 없었고 연출이 혼자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마침 잘 됐다며 할 말이 있으니 옆에 앉아보라고 했다.
연출 옆 책상에 있는 의자를 가지고 가 그의 옆에 놓고 앉았다. 그는 현재 내가 연습을 하고 있는 배역이 아닌 다른 배역을 새로 연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A와 C를 빨리 올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조연출은 나를 먼저 올려야 된다고 했지만 회사 사정상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 연습한 배역을 빨리 준비해서 두 달 정도 지방 공연을 갔다 오라고 했다.
나는 그때서야 조연출이 나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연습한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까웠다. 화가 났지만 담담하게 그럴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이곳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밥은 먹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출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와 조연출이 있는 지하 극장으로 내려갔다. 조연출은 객석에 앉아 끔벅끔벅 졸고 있었다.
"연출한테 혼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내 말에 잠을 깬 조연출이 고개를 쳐들었다.
"누구요? 그 노총각 아저씨요?"
나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고 그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는 먼저 나가서 극장 앞에 있겠다고 했다. 조연출이 나가고 나는 극장에 있는 개인 짐을 챙겼다. 홀로 짐 정리를 하면서 정이 들었던 극장을 둘러보았다. 연습을 할 공간이 있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극장을 나왔다. 극장 계단에서 우연히 극장장을 만났다.
"너 지방 공연 간다며?"
나는 씁쓸히 웃으며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 같지만 그만두기로 했다고 했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술과 야식으로 살이 쪄가는 그에게 건강을 위해서라도 살을 좀 빼시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는 하고 싶은 대로 살 것이라며 웃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극장 앞에 있는 가로등 밑에서 조연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그는 벌건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내 악수를 받아 주었다.
"술 한 잔 할까요? 제가 사겠습니다."
술을 사겠다는 조연출의 말에 나는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다.
"술은 다음에 즐거운 일로 마셔요."
기쁠 때 마시는 술맛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하고 싶었다.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조연출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나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를 한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를 달랬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훌륭한 배우가 되어 소속사가 있는 배우들한테도 밀리지 않을 거라고 약속을 하고 그와 헤어졌다.
극장을 등지고 걷는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멋진 배우가 되실 거예요 , 형님!"
조연출이 멀리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외치고 있었다. 그에 입에서 나온 '형님'이라는 말이 어색했지만 나는 가벼운 목례를 한 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들고 있는 짐보다 훨씬 무거운 마음을 안고 버스를 탔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좋아하는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이 버스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마로니에 공원에서 조연출과 여배우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는데 마음이 슬픈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음악이 끝나자 라디오 DJ가 작곡가 '라벨'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항상 입상에 실패했던 라벨이었지만 그를 인정해주는 좋은 스승을 만난 후부터 입상을 하며 빛을 보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나도 언젠가 좋은 스승을 만나서 배우로서 더 성장하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부모님이 잘 그만뒀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마음이 편안했다. 역시 가족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조연출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방 공무원을 준비할 거라는 것이었다. 열심히 해서 꼭 소방공무원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공무원이 돼서 내가 하는 공연을 꼭 보러 가겠다고 했다.
'서로 약속 꼭 지킵시다.'
이렇게 상처가 났다가 아물었다가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철처럼 단단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 어떤 일에도 아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철의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꼭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