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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우 김윤후 Aug 30. 2019

눈빛

눈빛

  오디션 합격을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식 연습실로 향했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렸지만 거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첫 미팅 때 캐스팅된 배우들을 보니 아는 얼굴이 없었다. 전 작품에 참여했던 배우들 중에서 합격한 사람이 나뿐이었던 것이다. 합격 당시에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나만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전 작품 동료 배우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나는 그들의 몫까지 열심히 해야 했다. 전 작품에서 왕자 역을 맡았던 선배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끝내 하지 못했다. 그와 함께 연습했던 시간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내가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가장 큰 미안함을 느꼈다.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컸다.  

  여자 주인공은 뉴질랜드에서 오랫동안 살다 온 배우였는데 음색이 맑고 깨끗했다. 연출님도 여배우의 음색을 많이 칭찬하곤 했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을 맡은 선배는 가창력이 출중했다. 거기에 좋은 신체조건과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객관적으로 봐도 주인공에 부합하는 멋진 배우였다. 그때 느꼈다. 훌륭한 배우들은 많고 이 사람 또한 언젠가 내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전 작품의 배우들과 달리 그곳의 배우들과는 깊게 친해지기 힘들었다. 각자의 개성도 강하고 연기와 노래도 잘했지만 춤을 잘 추는 댄서 느낌의 배우들도 많았다. 또, 남자 배우들은 연습이 끝난 뒤 술을 즐겨했지만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고 집도 멀었기 때문에 항상 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래서였을까 술을 좋아하는 배우들끼리 더 친해지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억지로 술을 마시면서까지 그들과 친해지고 싶진 않아서 연습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냈다. 

  안무 감독님은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안무가였다. 퓨전 판타지 성향이 강한 작품이어서 한국무용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춤이 부족한 나뿐만 아니라 재즈를 위주로 춤을 추던 다른 배우들도 한국무용을 단기간에 습득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배우들은 잘 따라가지 못했지만 안무 감독님은 항상 온화한 성품으로 차근차근 지도를 해 주었다. 

  그럼에도 너무 그림이 나오지 않자 안무 감독님은 한국무용 전공의 무용수가 필요하다고 연출부에 요청했다. 그리고 연출부에서는 배우들과 함께 공연에 참여할 수 있는 전문 무용수를 투입시켜 주기로 약속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약속대로 무용수가 왔다. 이십대 중반에 키가 작고 아담한 체구의 여성은 머리를 뒤로 묶고 검은색 배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첫눈에 꾸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나이도 제일 어리고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H예술대학교 재학 중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그녀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고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빨리 우리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럼 실력 좀 보여줄까?"

  안무 감독님은 우리들에게 그동안 연습한 안무 동작들을 해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그녀는  

  '이런 것들이랑 같이 무대에 올라가야 돼?'

  

뮤지컬 미추홀에서  온 남자(2015)



그런 심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무용전공이 아닌 우리가 능숙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겠지만 대놓고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기분이 나빴다. 춤을 추면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는 눈이 커지면서 놀라더니 곧바로 표정을 관리하며 우리들의 춤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어때?”

  우리들의 춤이 끝나자 감독님이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처음 하는 것 치고는 다들 너무 잘하시네요."

  그녀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재빨리 내 눈을 피했다. 

  "춤추는 거 보여주세요!"

  배우에게 갑자기 '연기 보여 주세요' 하는 것과 같은 무례한 행동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춤을 보여 달라고 크게 소리쳤다. 주변에 있는 배우들도 내 말에 동조하면서 춤을 보여 달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녀는 선심 쓰듯이 '네'라고 대답하고는 스피커와 자신의 핸드폰을 연결했다. 그리고 십 초 가량 몸을 풀더니 음악을 틀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움직임은 거친 파도로 변했다. 나는 넋을 놓고 그녀의 춤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사랑스러운 표정과 우아한 동작으로 춤을 마무리 지었다. 

  "뭐... 잘하네."

  음악이 끝나자 휴대폰을 챙기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춤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날 이 후로 같이 연습을 하면서도 최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훔쳐보면서 스스로 깨우치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 연습을 하던 중 연출님이 오셔서 기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을 제외한 배역들에 대한 내부 오디션을 본다는 말씀을 하셨다. 배우들은 갑자기 보는 오디션에 놀란 눈치였지만 나는 사실 떨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런 순간이 빨리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주연들만 연습이 있는 날에도 연습실로 찾아가 그들의 상대역을 해주면서 연습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 주연들과 리딩을 하고 자유곡을 불렀다. 연출진도 진지한 표정으로 심사를 했다. 

  그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오디션을 마친 배우들은 밥을 먹으러 갔다. 다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수다를 떨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었지만 나는 다른 자리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식사 후 스태프진과 배우들은 연습실에 앉아 발표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연출님이 들어오자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적막에 휩싸였다.

  "다들 너무 잘해서 누굴 뽑아야 하나 엄청 고민했어."

  연출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숨죽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연출님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첫 배역은 내가 하기로 했던 배역이었다. 첫 장면에 죽어가는 소년병의 역할이었다. 

  "이XX."

  내가 아니었다. 당황스러웠다. 내심 그 역할을 오랜 시간 동안 준비했던 터라 내가 뽑히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컸다.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그가 나보다 더 왜소하고 소년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좌절감에 더 이상 발표를 듣고 싶지 않았다.


뮤지컬 작업의정석 2017(배우 진세인)


그런데 놀랍게도 그다음부터 발표되는 모든 배역들에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다섯 개 배역 중에 네 개의 배역으로 뽑힌 것이다. 한 배역은 내가 캐스팅되었으면 했던 죽어가는 소년병의 상대역이었다. 주인공과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군, 주인공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는 농민 대장, 주인공의 친동생인 왕자. 그 모든 역할들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서 연출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보면서 작은 소리로 고생했다고 속삭였다. 그리고는 배우들에게 무대 위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열심히 노력하면 기회가 온다고 말했다. 그는 배역도 정해졌으니 이제 배우장(배우들 중에서 반장 같은 역할)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 배우들은 나에게 절대 권력을 선사하겠다며 나를 추천했고 나는 강제로 배우장까지 하게 되었다.

  보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쉬는 시간에 연출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한국무용을 하는 막내가 배우들 사이에서 겉도는 것 같다며 내가 배우장이니까 잘 좀 챙기라고 했다. 

  그녀는 연습실 구석에 혼자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이도 가장 어리고 배우도 아닌 무용수가 이곳에서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 상황이었다. 명문대 출신에 춤도 잘 추는 그녀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배우장으로서 그녀가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배우들은 늦은 밤까지 연습을 한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 같이 지하철을 탔다. 각자 자리에 앉아 동료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지하철 제일 끝자리에 앉아 녹화해 두었던 연습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배우들이 하나둘씩 인사를 하고 지하철을 내렸고 마지막엔 나와 막내인 무용수만 남았다. 그녀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네가 막내 좀 잘 챙겨줘.'

  연출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 건너편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옆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한쪽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더니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그녀에게 사는 곳을 물었다. 그녀는 내가 사는 곳에서 20분 거리의 동네에 살고 있었다. 이전에 꽤 먼 거리로 느껴졌던 동네였지만 인천으로 출퇴근하는 지금은 상대적으로 가깝게 느껴졌고 방향도 거의 일치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환승역까진 그녀와 함께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환승역으로 갈 때까지 더 이상 이야기를 이끌어 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갈아타야 한다며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중간쯤에서 내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화장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내가 일부러 내린 것을 들킨 건 아닌지 조마조마해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하루하루 연습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늦게 연습을 마치게 되는 날이 점점 많아졌고 배우들은 밤이 깊어서야 서울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30분 정도 지나 모두 하차하고 나면 그녀와 나 둘이 남았다. 나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에 내리지 않고 본래 갈아타는 환승역까지 가서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점점 배우들 속에 잘 녹아들었다. 처음과 달리 밝은 성격으로 변한 그녀는 배우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막내로 연습에 임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배우들도 그녀에게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뉴스에서 오후에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들었다. 바깥 날씨가 화창해서 잠시 망설이다가 장우산을 챙겨 연습실로 향했다. 평소처럼 몇몇 배우들로부터 배우장인 나에게 십 분 정도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 지각이 습관인 그들에게 벌칙으로 스트레칭 시간을 오 분 추가할 거라면서 조심해서 오라는 답장을 했다. 그러다가 막내인 그녀로부터 갑작스러운 일로 오전 연습은 참여할 수 없다면서 오후 연습부터 참여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불참 소식에 의아했지만 나는 조연출에게 그녀가 어젯밤부터 몸살이 있어서 늦게 연습에 참여할 거라고 했다. 어제 연락이 왔는데 내가 깜빡하고 이제 알려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조연출은 커피 한 잔 사준다면 자신도 깜빡했다는 말로 연출님에게 보고하겠다고 내게 답했다

  '땡큐'

  조연출에게 고맙다고 하고 그녀에게 잘 처리됐다는 연락을 했다. 그녀 답지 않은 행동에 걱정이 되었지만 깊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연습실에 가보니 그녀가 음악을 틀어 놓고 몸을 풀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평소보다 얼굴빛이 어두워 보였고 컨디션도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쉽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조용히 구석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풀고 있는데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배우들이 그녀에게 장난을 쳤다. 웃으면서 장난을 받아 주는 그녀였지만 눈은 슬퍼 보였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로 가다가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토끼눈이 되어 있었다. 내심 놀랐지만 못 본 척하고 태연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연출님에게 보고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집으로 가면서 면담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삼십 분 정도 지나자 평소처럼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오늘 남자 친구랑 헤어지려고요."

  담담히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아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지하철역을 확인했다. 노량진역 밖으로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이럴 줄 알고 장우산을 가지고 왔다며 그녀에게 우산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

  나는 무거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지난번처럼 중간에 먼저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침묵을 깨고 다음 역에서 내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심해서 가라고 하며 우산을 건넸다. 그녀는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비가 많이 내리니 가져가라고 했다.

  “제가 아끼는 우산이라 드릴 수는 없고 빌려 드릴게요. 꼭 돌려주세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영국 맨체스터를 연고지로 하고 있는 축구팀의 로고가 크게 그려진 장우산을 건네받았다.

  "XX이는 명품 백팩이 있지만 저한테는 이 우산이 그런 존재거든요. 꼭 돌려주셔야 돼요.”

  명품을 좋아하는 배우를 들먹이면서 나는 영국에서 직수입한 고급 장우산이 내 인생 최고의 사치품이라는 말을 했다. 그녀의 슬픈 눈빛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키가 작은 그녀가 허리춤까지 가리는 우산을 들고 가는 모습이 초등학생 같았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속에서 생각했다. 힘든 줄 알면서 왜 다들 사랑을 하는 걸까. 그 때에 나에겐 사랑이란 그녀에게 빌려준 장우산보다 백배 천배 비싼 사치 같았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문득 이별을 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내리던 그녀의 슬픈 눈빛이 떠올랐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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