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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우 김윤후 Aug 23. 2019

어느 연극배우의 초상

어느 연극배우의 초상


 제대를 하고 팔 개월 정도 지나서야 겨우 본격적인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천오백 석의 큰 극장에서 올리는 공연이기에 그 무대를 밟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벅찼다. 이탈리아에서 온 연출은 내가 에너지가 좋다며 왕의 호의무사 역할을 맡겼다. 큰 창을 들고 부동자세로 왕 뒤에 서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너무 행복하게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열흘에 걸친 공연이 끝나자 추운 겨울이 왔다. 날씨는 매섭게 차가웠지만 내 마음은 오월의 봄처럼 따뜻했다. 운이 좋게 서울시에서 하는 뮤지컬 오디션의 합격 연락이 온 것이다.  노래 레슨을 받으면서 오디션 준비를 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연습 때 배우들을 포함한 모든 스태프들이 모여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스물아홉의 나이에도 막내급인 것이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연출님이 유명한 작곡가였던 것이다. 그는 인자한 미소로 나를 볼 때마다 음색이 좋다는 말을 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칭찬을 들어야 성장한다는 것을

  연출님의 칭찬 효과가 먹혔던 것일까. 나는 공식 연습시간보다 일찍 가서 미리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식 연습시간이 열두 시임에도 불구하고 아홉 시를 조금 넘어 극장에 도착했다. 스무 명이 넘게 써도 충분할 법한 넓고 좋은 대기실이었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짐을 내려놓고 대기실부터 무대까지 쓸고 닦은 후에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 오백 석 규모의 큰 극장이었음에도 내 목소리가 객석 전체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은 배역들 뒤에서 춤추고 코러스를 넣어주는 앙상블이지만 나도 언젠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솔로곡을 부를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청소를 누가 해놨네?"

  환경미화를 하는 여사님이 대기실을 통해 무대 쪽으로 왔다. 그리고 청소를 미리 다 해놔서 고맙다며 밝게 웃었다. 나는 앞으로 매일 일찍 와서 청소를 할 테니 대기실과 무대는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여사님은 안 그래도 된다고 하면서도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객석을 청소하기 시작했고 나는 계속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한 시간 정도 연습을 하고 나니 여자 주인공 선배가 극장으로 들어왔다

  "일찍 왔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그녀는 나에게 언제 적 사람이냐며 웃었다. 그리고 요즘 누가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냐면서 '누나'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혼자 연습을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이 출연한 대극장 작품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유명 배우들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열심히 했다면서. 그리고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배우가 되라고 말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

뮤지컬 미추홀에서 온 남자(2015)

 그리고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데 얼마 후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극장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요가를 하고 있는 여선배에게 인사를 한 후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왜 이렇게 일찍 왔냐며 물었다. 나는 아까와 같은 대답을 하며 그들과 함께 노래 연습을 했다. 

  얼핏 들어도 노래를 참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가창력도 좋았지만 음색이 깨끗하고 예뻤다. 속으로 기가 죽었지만 나도 지고 싶지 않아서 내가 제일 잘하는 노래를 공식 연습시간까지 불렀다. 

  배역을 맡은 사람들은 그전부터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 같았지만 나는 초면이라 사실 좀 어색했다. 그럼에도 아침마다 일찍 나와서 함께 연습을 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배역을 맡은 선배들은 주로 대극장에서 공연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유명한 작품들을 했기 때문인지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프로정신이 투철했다. 몇몇 배우는 목이 건조해지기 때문에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에 커피를 세, 네 잔은 기본으로 마시는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프로니까."

  그 한마디에 할 말을 잃었다. 나도 술 담배는 하지 않았지만 자기 관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순간 내가 그들과 같은 무대를 선다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들이 크고 좋은 무대에서 공연을 설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노력하고 인내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말도 했다. 배우들은 누구나 서로 경쟁자이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없는 특별한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 조언들은 내게 너무 고마운 것이었다. 한편으로 내가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나는 더 일찍 나와서 연습을 했다. 그들 옆에서 미숙하게 부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극장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나와 청소를 한 후에 아직 연습이 덜 된 노래들부터 부르다가 그들이 올 때쯤엔 어느 정도 자신 있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 내 패턴이 반복되자 왕자 역을 맡은 선배가 새로운 노래를 연습해야 한다며 몇 개의 뮤지컬 넘버들을 추천해 주었다. 그때부터는 그 노래를 연습하고 배역을 맡은 선배들이 오면 그들에게서 조금씩 지도를 받았다.  왕자 역할을 맡은 선배는 나를 보며 과거의 자신이 생각난다며 열심히 노래를 지도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와 친해졌고 실력으로나 인성으로나 부족함이 없는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사람처럼 배역을 맡게 되면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공식 연습시간이 될 쯤에야 도착하거나 조금 지각을 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앙상블들이었다. 그들은 나와 같이 대학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인데 술을 참 좋아했다. 거의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왔지만 놀랍게도 막상 연습에 들어가면 눈빛이 달라지면서 자신들의 본분인 몸을 쓰는 일을 너무나도 잘 해냈다. 그러고 나서는 나를 향해 말했다. 

  "봤어? 쩔지?"

  나는 대단하다고 그들에게 박수를 쳐 주었지만 전날 술을 마시고 연습에 참여하는 것이 프로정신이 강하고 부지런한 배역 선배들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배역을 맡은 여선배들 중 한 명이 내게 귓속말로 말했다.

  "너는 저 사람들처럼 살면 안 돼."

  나는 웃으면서 '네'라고 조용히 대답했지만 왠지 그들이 싫지 않았다. 아마 나와 같이 대학로에서 활동하는 그들에게 정이 가는 점도 있었겠지만 주조연배우들과 또 다른 배울 것들이 있었다. 

  앙상블 선배들은 연습이 끝나면 항상 술을 마시러 갔다. 그리고 연습 때 할 수 없었던 말들과 속내들을 털어놓았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술자리를 통해서 하는 것 같았다. 

  가끔 그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그러나 술이 약한 나는 거의 마시지 않고 매번 오후 열 시가 되기 전에 귀가를 했다. 그런 점이 그들에겐 서운한 부분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쉬는 날에는 같이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축구를 하면서 나름대로 그들과 감성을 공유하려고 노력했다.

  연습을 하면서 실력이 늘어가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왕자 역을 맡은 선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홀로 연습을 하는 모습이라거나 전체 연습을 할 때의 모습 하나하나를 담아내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공주와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병사인 나도 언젠가 저 사람처럼 솔로곡도 부르고 대사도 많이 하는 배우가 되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은 열두 시 공연이기 때문에 오전 아홉 시에 연습을 시작했다. 왕자 역의 솔로 곡을 주로 연습했다. 뒤에서 볼 때는 그렇게 어려운 곡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는데 막상 불러보니 쉽지 않았다. 다시 한번 왕자 역을 맡은 선배가 노래를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왕자라는 상상을 하며 솔로 곡과 공주와 함께 부르는 듀엣 곡을 텅 빈 극장에서 부르고 있는데

뮤지컬 근초고왕(2015)


 

 "일찍 왔구나."

 객석 끝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조명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무대에서 내려가 확인하니 연출님이었다. 나는 이른 시각에 그가 이곳에 나타난 데 놀라며 객석 중간까지 내려온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못 볼 사람을 본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느냐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면서 내가 아침마다 일찍 나와서 연습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자 연출은 눈과 귀가 백 개씩 있다고 했다. 

  "다음 작품 정해졌니?"

  "아닙니다. 오디션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디션을 왜 봐? 나랑 다음 작품 해야지?"

  "네?"

  나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는 자신의 차기작에서 소년병 역할로 나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설명하는 차기작은 인천시에서 대대적으로 투자를 받아 올리는 작품이었다. 그는 간단하게 시놉을 설명하면서 지금 공연보다 큰 규모로 만들 예정이라 연습이 더 힘들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연출님의 제안에 나는 너무 기뻐서 허리를 굽히고 큰 소리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내가 성실하게 공연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상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미지와 음색도 어울린다고 하면서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크다는 말과 함께 남은 공연도 열심히 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래도 오디션은 봐야 된다!"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내 어깨를 토닥인 후 뒷짐을 지고 껄껄껄 웃으며 극장 밖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난 후 나는 맨 앞 줄 가장 바깥쪽에 있는 객석에 앉았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위해서 배우를 시작한 걸지도 몰랐다.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항상 묵묵히 나를 응원해준 가족들, 젊었을 때는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교수님이 떠오르며 지금까지 마음이 아프고 다쳐도 포기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배우로서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 오늘 날아다니던데, 무슨 일 있어? 눈빛도 달라진 것 같고."

  공연이 끝나자 선배들이 내가 달라진 것 같다고 했다. 지금 배역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당장 실력으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대신 이번 작품을 통해 앙상블을 맡은 사람들 중에서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를 마음속에 새겼다.

  그들보다 한 발짝이라도 더 멀리, 더 큰 동작으로, 더 부드럽게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며 공연에 임했다. 하루아침에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무대에서의 움직임이 편해졌다고 느껴졌다. 선배들도 내게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왕자 역을 맡았던 선배는 더 열심히 해서 다음에 이 작품을 올릴 땐 내가 왕자 역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꼭 그렇게 돼야지'라고 외쳤다. 선배는 노력하면 꼭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나를 응원해 주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쫑파티를 할 때에도 그는 같은 말을 하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다음 작품 오디션 지원을 하고 난 후부터 매일매일 오랜 시간을 연습실에서 연습에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 있는 노래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연습한 모든 것을 오디션 장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고민 끝에 네 곡의 하이라이트 부분만 편집을 해서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그 정도면 내 장점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디션 당일,  많은 오디션 참가자들 중에서 배역을 맡았던 선배들을 포함해 전 작품에서 앙상블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면서도 그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이미 연출님이 내게 해준 말은 잊은 지 오래였다. 순서를 기다리다 내 차례가 되어 오디션장에 들어갔다. 긴 테이블엔 연출님을 필두로 여러 명의 감독들이 앉아 있었다. 

  '할 수 있어'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며 자유연기와 자유안무를 끝마쳤다. 이어서 준비한 음악의 MR이 흘러나왔다.  


  간 절한 기도 신이여 허락하소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지금 이 순간)       

  해맑은 그 미소 눈이 부셔 나의 사랑 수정~

    (뮤지컬 내 마음속 풍금-나의 사랑 수정)     

  살아 있어~ 이렇게~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난 살아있어)                    

  가야 해~ 저 별을 향하여~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이룰 수 없는 꿈)   


 노래가 끝나자 심사위원 전원이 박장대소를 했다. 연출님도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웃으며 누구 아이디어냐고 물었다. 나는 가지고 있는 장점을 다 보여드리기 위해서 네 곡을 편집해서 준비했다고 대답했다. 음악감독은 웃으며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조언해 주었다. 

  오디션장을 나오면서야 나는 내가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대기자들도 웃고 있었다. 너무 창피해서 선배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디션장을 빠져나왔다. 

  그날은 하루 종일 왜 그랬을까 후회를 했다.

  '떨어졌겠지'

  너무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큰 기회를 놓친 사실에 슬픈 생각이 들면서 후회 속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축하합니다...'

  합격통지 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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