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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레시피 Aug 24. 2016

피터 슈라이어의 10년, 그리고 Post 슈라이어

위대한 디자이너에 대한 트리뷰트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동차" 디자이너라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구체적인 설문조사 데이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현대차그룹의 피터 슈라이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2006년 9월 기아에 영입된 후 디자인 기아를 이끈 장본인이며 2013년에는 그룹 디자인 담당 사장으로 승진해 현대, 기아 디자인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디자이너로서 작년 11월 모터트랜드가 선정한 자동차 업계 올해의 인물 중 3위, 디자이너 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그는 신형 i30 디자인 티저 영상에 등장해 간략하게 i30와 현대차 디자인 방향성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형 i30는 간결하면서도 역동성이 느껴지는 디자인으로 현대차 디자인의 비전을 보여준다고 평했습니다.  

  그는 현대차그룹 디자인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디자이너입니다. i30 티저 영상을 보며 올해로 취임 10년을 맞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터 슈라이어=현대차 그룹 디자인의 대표 얼굴


그가 아무래도 한국의 자동차 팬들에게 익숙한 이유는 그룹의 CDO답게 i30 디자인 티저 영상뿐만 아니라 최근만 해도 K5,K7, 제네시스 브랜드 발표, EQ900 런칭 등 현대차 그룹의 중요한 행사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인듯합니다.  그가 대내외적 행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물론 그가 그룹 내에서 중요한 인물이고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디자이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 기아에 오던 10년 전에는 이정도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닌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피터 슈라이어의 위대했던 10년


 기아가 10년 전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면서 유럽 3대 디자이너를 영입했다고 보도자료를 내긴 했지만, "유럽 3대 디자이너"라는 건 어디까지나 홍보를 위한 기획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3대 디자이너라는 것이 어느 기관이 공식적으로 선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만 해도 국내에 아직 생소했던 피터 슈라이어가 같이 언급된 월터 드 실바, 크리스 뱅글 정도로 실력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수사인걸로 보입니다.  

(이 유럽 3대 디자이너라는 수사는 차후에 세계 3대 디자이너로 확대되게 됩니다. 제가 서칭을 잘 못한 건지 몰라도 기아가 영입 발표 직전인 2006년 7월 이전 구글 검색 상 어떤 영문 문서에서도 피터 슈라이어가 유럽 3대 디자이너라는 얘기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다른 두 인물에 비해 언급 빈도가 낮았습니다.)


 그렇다고 피터 슈라이어가 실력이 없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그는 분명 이직 전 TT, 비틀등 디자인에 참여한 아우디/폭스바겐의 중요한 디자이너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결과물로 자신의 클래스를 증명해왔습니다.


그는 기아에 패밀리룩을 도입하고 쏘울, 쏘렌토, K7, K5, 스포티지로 이어지는 화려한 디자인 라인업을 이끌며 기아가 단숨에 유럽과 미국에서 주목할만한 브랜드로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총괄 사장으로 옮긴 뒤에는 현대와 제네시스 브랜드의 디자인을 이끌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현대차그룹의 간판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처음 기아로 올 때는 유럽 3대 디자이너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는 10년간의 결과물을 통해 세계적인 디자이너 반열에 올랐습니다. 최근에는 아예 그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디자이너라고 꼽는 매체들도 늘어났습니다. 한국 브랜드의 디자인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로로 자동차 디자인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이죠. 그의 영입은 기아에게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일생일대의 좋은 기회였던 겁니다.

자동차 디자인에서 피터 슈라이어의 역할


 그렇다면 그는 실제 자동차 디자인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사실 자동차 디자인은 예술 작품과 다르게 워낙 종합적인 협업 활동이라 어느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하기 힘듭니다. 이 때문에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누구 한 명이 나서서 하는 인터뷰를 꺼리는 편입니다. 피터 슈라이어는 총괄 책임자로서 디자인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가 하이라이트를 많이 받긴 했으나, 사실 당연히 사장인 그가 모든 디자인을 직접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스포츠로 치면 감독 역할


 자동차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팀 활동입니다. 디자인 프로세스는 Key 스케치, 렌더링-테이프 드로잉-CAS-1:1 Mock up 제작-컬러까지 몇 년에 걸친 다양한 과정으로 이루어지며 익스테리어/인테리어 각각의 실무 책임자와 헤드 램프등 세부 아이템 담당자, 디자인/엔지니어링 조율까지 다양한 분야의 연구원들이 참여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 디자인은 세계 각지에 위치한 각 디자인센터와의 협업이 중요한 글로벌 프로젝트입니다.


이 과정에서 조율하고 결정하는 것이 바로 피터 슈라이어의 역할입니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경기를 뛰는 선수들이 있고 피터 슈라이어는 감독이랄까요. 아무래도 피터 슈라이어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Key Design까지 스케치를 직접 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Key Designer는 보통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터 슈라이어의 역할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전체적인 디자인 방향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상당히 세세하게 가이드라인을 주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여느 유럽 디자이너처럼 아직도 직접 드로잉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과거 기아차 디자이너들의 인터뷰에도 잘 드러납니다.



"피터 슈라이어는 세밀한 부문을 다듬는 과정에서 통일성과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조정해주는 역할을 상당히 잘 해주었다."

"그는 아주 세심한 일까지 관여한다. 우리와 계속 얘기한다."


  구글에서 최고의 상사는 어떤 사람인지를 연구한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은 "좋은 리더"의 조건은 "일관성"이었다고 합니다. 피터 슈라이어는 디자인 전체 방향에 대한 제시를 통해 각각의 디자이너가 일관성 아래에서 자기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의 든든한 방패

 피터 슈라이어가 직접 디자인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터 슈라이어가 부임한 후 기아차의 디자인이 좋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감독이 와도 선수가 엉망이면 그 팀은 잘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현대차 그룹의 경우 좋은 감독이 와서 선수들의 잠재력을 잘 이끌어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기아차는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현대기아차의 디자인 발전에는 그의 디자인 능력도 큰 역할을 했지만, 그의 존재감이 더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자동차 회사는 디자인 개발 과정에서 무수한 "품평"이라고 불리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은 실내, 실외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집니다. 현대차 그룹의 경우도 유럽, 미국, 한국 디자인 센터에서 초기부터 디자인 경쟁 PT를 하고 개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임원, 개발자, 생산, 품질, 마케팅, 영업 등 각 부분에서 디자인을 평가하고 의견을 냅니다.
 

 피터 슈라이어 이전에는 아무래도 개발, 영업 등의 발언이 강했다면 피터 슈라이어 이후에는 "디자인 경영"이라는 깃발 아래 디자인 부문의 발언이 강해졌습니다. 때문에 디자이너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긴 차량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임원급들의 말 한마디에 디자인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피터 슈라이어가 있으므로 임원급들도 말을 아끼게 되어 디자이너들이 소신을 갖고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게 된 덕이 큽니다. 


 또한 기아가 이렇게 운영되니 현대 쪽도 이에 자극받아 피터 슈라이어가 총괄 사장으로 부임하기 이전인 2012년에 싼타페 DM 같은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봅니다.


현대차 그룹의 대표 열굴

  피터 슈라이어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얼굴" 역할입니다. 얼굴 마담같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대표 얼굴 역할은 말 그대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유럽 쪽은 자동차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아직까지도 개개인의 아시아 디자이너들의 실력은 인정해도 아시아 회사의 작품에 대해서는 마음 깊이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이는 피터 슈라이어가 영입되었던 2000년대 중후반에는 더 심했습니다.


기아는 피터 슈라이어를 대표 얼굴로 내세워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인이 총괄한 디자인으로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어필이 가능했던 거죠. 이러한 기조는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같은 차량을 런칭할 때도 국내 보도자료에는 남양 디자인센터에서 주도했다고 하고, 해외 보도자료에서는 유럽 or 미국 디자인 센터에서 주도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번 i30 디자인 티저에서도 피터 슈라이어가 등장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유럽에서 만든 유럽 차량임을 홍보하기 위해 디자인부터 유럽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포스트 피터 슈라이어는?


 동안인 편이라 나이를 미처 실감하지는 못했지만 53년생인 피터 슈라이어도 어느새 은퇴를 생각할 시점이 다가왔습니다. 또한 그가 아무래도 현대차, 기아차 모두를 맡다 보니 두 회사의 디자인이 서로 닮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그의 Capacity를 두 브랜드 아니 이제는 세 브랜드가 나누어 쓰다보니 그도 힘에 부치는 걸까요?

  이전에 그는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현대는 고급, 우아함 기아는 스포티함, 젊음으로 차별화할 것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으나 그 말이 무색하게 요즘 보면 현대 디자인이 과거 스포티지R, K5 시절의 기아 디자인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는 현대차 그룹도 슬슬 피터 슈라이어를 지원해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나가고 장기적으로는 그를 대체할 인물 만들기에 나서는 모양새입니다.

현대-외부 영입 전략

 

 현대는 외부에서 스타급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모양새입니다. 벤틀리 수석 디자이너 출신인 루크 동커볼케를 현대 디자인센터장 (전무)로 영입했으며 그는 피터 슈라이어가 유럽으로 주로 출근하는 것과 다르게 한국의 남양으로 출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현대차는 루크 동커볼케에 이어 같은 벤틀리 출신 이상엽 디자이너를 스타일링 담당 상무로 임명했습니다. 또한 메르세데스-벤츠를 거쳐 벤틀리에서 일했던 윤일헌 디자이너를 제네시스 디자인 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현대는 이들을 중심으로 차후 제네시스, 현대차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나갈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한 루크 동커볼케의 경우 워낙 거물이기 때문에 피터 슈라이어 은퇴 후에는 그룹 총괄 디자이너 자리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아 - 내부 육성 전략

  기아는 외부에서 스타급 인사를 영입하기보다는 차츰 내부의 다른 인사들을 소개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아직은 뚜렷한 중심인물이 없다는 얘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신차들의 디자인이 응집력이 다소 없어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아 미국 디자인센터의 수석인 톰 컨스는 K3 PE 디자인 소개 영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미국 내 기아 행사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기아 유럽 센터의 수석인 그레고리 기욤은 씨드의 메인 디자이너로 유럽에서 인지도가 높으며, 최근에는 부산모터쇼에 피터 슈라이어와 동행해 기아자동차관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들뿐만 아니라 훌륭한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많습니다. 스포티지(SL), K5(TF) 등을 주도적으로 디자인했던 디자이너들이 팀장, 실장급으로 활약 중입니다. 이들같은 한국인 디자이너가 Post 슈라이어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한국인 디자이너가 한국 회사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그림을 기대해봅니다.

디자인은 언제나 핵심 경쟁력


 피터 슈라이어의 지난 10년은 현대기아차가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가지게 된 10년이기도 합니다. 그 기간 동안 품질, 기술력 등도 많이 발전했지만 현대기아차가 여기까지 오는 데는 디자인 경쟁력 강화 덕이 컸습니다. 

  앞으로의 시대가 전기차든, 수소차든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이든 디자인은 언제나 핵심 경쟁력으로 남을 것입니다. 과거 애플 제품이 센세이션 했던 것은 신개념의 제품인 점도 있지만 디자인이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도 주효했습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겉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오는 현대기아차의 디자인은 예전처럼 "WOW"하는 디자인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벤츠, BMW, 아우디 같은 디자인 아이덴티티가 명확하게 자리 잡은 회사들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다른 회사들도 디자인 역량을 가다듬으며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르노 역시 네덜란드 출신 로렌스 반 덴 에커가 총괄을 맡으면서 빠르게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대차 그룹 입장에서는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디자인 역량을 강화해나가고 아이덴티티를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현대차 그룹 입장에서 다행인 것 중 하나는 디자인에 대해 민감하고 눈이 높은 동시에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한국 소비자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한국 소비자의 높은 기대치를 만족하는 차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봅니다.

*사진: 현대차, 기아차, 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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