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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슨 Mar 19. 2019

다들 고양이가 예쁘다고 한다

다들 고양이가 예쁘다고 한다. 같은 생각이다. 고양이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다. 눈앞의 고양이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우리에겐 고양이가 있는데 세상에 더 이상 무슨 예술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멍 때리기 시합처럼 고양이 오래 쳐다보기 시합 같은 게 있다면 꼭 한번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고양이 예찬론자들은 대개 고양이를 키웠거나 키우는 사람들이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것이 어떠한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된 이상 그 동물을 예찬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그러한 예찬론의 수혜자이자 전파자였다. 지금은 아니다. 그렇게 되었다.


2012년 5월, 한창 주변에서 고양이 예찬이 쏟아지던 때 우리의 첫 고양이를 입양했다. 애견샵에 버려진 성묘였다. 듣던 것보다는 손이 많이 갔지만, 충분히 행복하게 지냈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일상의 자잘한 행복감에 대해선 말해 뭐 할까. 고양이를 들이세요, 라는 말을 그전까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 초, 녀석에게 병이 생겼다. 3기와 말기에 걸친 만성신부전이었다. 얼마를 살진 모르지만 여생을 호스피스로 지내야 한다고 했다.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 바닷가 마을에 살던 터라, 근방에 괜찮은 동물병원은 전무했다. 그나마 나아 보이는 (두 시간 반 거리의) 병원에서 퇴원한 후 3개월간은 정신 차리기 힘든 간병 생활이 이어졌다. 그 경험은 결국 시골살이를 접고 서울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절반의 이유가 되었다.



아픈 고양이와 함께하는 동안 가장 힘든 건 두 가지의 마음이다. 죄책감과 책임감. 고양이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했다는 죄책감은 초반에 유독 심했다. 비위생적인 병원 케이지에 아이를 입원시켜놓고 집에 와서 빈 사료 그릇을 봤을 때의 그 참담한 회한은 지금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책임감에 관해선 더 생각이 많아진다. 동물은 사람과 달리 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생의 모든 시간을 보호자가 도맡아야 한다. 키워보면 파양이 얼마나 비겁한 짓인지 알게 되고, 그럼 다른 옵션은 없다. 나날이 묵직해져가는 책임감만 남을 뿐이다. 그러다 고양이가 아프면, 그 감정은 몇 배로 뛴다. 말이 책임감이지, 실은 갑갑함과 부담감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두려움이다.


모두 고양이가 예쁘다고들 한다.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고양이에게서 아름다움만을 보지는 못한다. 어찌할 수 없이, 아픔을 함께 본다. 그 아픔은 고양이의 것인 동시에 보호자의 것이다. 때론 (당연하게도) 간병하는 사람의 마음에 감정이입이 더 잘된다. 단순히 이런저런 약을 먹이고, 뒤처리를 하고, 피하수액을 맞히는 일만이 간병은 아니다. 사람이 그러듯 고양이도 투병이 계속되면 성격과 행동에 변화가 생긴다. (가끔은 고양이 치매가 아닌지 의심도 한다.) 간병은 육체적이면서 정신적인 노동이다. 아픈 고양이를 바라보는 보호자의 마음은 그 자체로 정신노동을 하는 중이다. 아름다운 피조물을 아름답게만 보지 못하게 돼버린 자의 사연이란 대강 이렇다. 다른 간병인들의 사정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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