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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슨 Jul 27. 2019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모두가 의미를 좇는다. 인간은 스스로 의미 있다고 느끼는 일을 하지 않으면 불행해지니까. 의미를 부여할 대상은 많다. 누구는 생업이 주는 성취감에서 의미를 찾고, 누군가는 취미생활에서 의미를 챙기기도 한다. 좋은 부모가 되는 데 의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돈이나 명예를 쌓는 일이 삶의 의미가 된 이들도 있다. 그렇게 저마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려 애쓴다. 내가 나만의 독립적인 출판을 시작한 이유 역시 조금이나마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생을 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간혹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십여 년 전에 만나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는, 강원도에 살면서 서울을 오가며 사회 변혁 운동에 자신의 모든 걸 쏟던 활동가였다. 토론과 집회 등에 참석하며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던 그에게, 나는 그렇게 사는 것이 솔직히 힘들지는 않은지 물었다. 대답은 명료했다. 자기보다 훨씬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내 힘듦이 별거 아닌 듯 느껴지는 데다, 힘든 점이 있어도 지금 이 순간 자기 삶의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음에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지난 한 달간 박노자의 한겨레 칼럼 ‘1930년대가 돌아온다’와 블로그 포스트 ‘나의 미래 비관론’에서 읽은 내용이 이상하게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율 하락과 그에 따른 불안정한 세계정세로 예견되는 징후들은 예전부터 공감해온 바지만, 열강 간 경쟁과 성장률이라는 덫에 걸린 세계 경제가 미래에 불러올 파국에 대해 이처럼 피부로 와닿게, 즉 쉬운 말로 설명해준 글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혈액형이 다른 피로 끊임없이 수혈을 받으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현 자본주의가 언제쯤 어떤 모습으로 종말 내지 변형을 맞을지 상상해보는 일은 늘 흥미로우면서도 두렵다. 가장 먼저 고통받을 이들은 나와 같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일 테니.


지금 그 활동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각한다. 여전히 어느 조직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고, 생업에 바빠 잠시 운동에서 멀어졌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삶의 의미를 그때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좋은 영감을 주어온 박노자도 ‘입만 산 지식인’이라는 딱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현실에 대한 해석(말과 글쓰기)에서 의미를 찾을 뿐 정작 그 해석을 현실화하는 행동에는 좀처럼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뭐 하나 나은 게 없는데. 새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에서부터 의미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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