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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슨 Sep 03. 2019

<기억의 발굴>을 읽고 있다 1

그 어떤 책보다도 내가 선택해 펴낸 책을 공들여 읽고 싶고,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싶다.




카라칼의 첫 책 <기억의 발굴>을 출간했다. 얼마 전 왜 이 책을 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많은 1인 출판사 운영자들이 그러듯, 나도 내가 읽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언제부턴가 소위 일반론적인 문장으로 쓰인 인문이나 에세이 책에 흥미를 덜 느끼게 되었다. 뜬구름 잡는 듯한 관념적인 글보다는, 같은 에세이 분야라도 손에 잡힐 듯한 구체적인 글이 확실히 더 좋아졌다. 채현국의 말을 조금 빌리자면, ‘머리로 쓴’ 책은 내 안의 꾀를 늘리지만 ‘몸으로 쓴’ 책은 내 밖의 세계를 늘려주는 것 같다. 나는 내 안에서 맴돌고 싶지 않고, 내 밖의 세계가 늘 궁금하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낸다는 건 곧 내가 이 책의 제1 독자가 된다는 것이고 열혈 독자가 된다는 뜻이다. 나는 독자로서 카라칼의 책을 가능한 한 오래, 그리고 깊게 읽고 싶다. 내가 낸 책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읽고 싶어 선택한 책이기에 그렇다. 이전에 출판사에 다닐 때는 마감이 끝나고 책이 나오면 그 책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만든 책에 대해 팀원들끼리 진지한 토론이나 대화를 해본 적도 없다. 나는 그게 늘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젠 그 어떤 책보다도 내가 선택해 펴낸 책을 공들여 읽고 싶고,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싶다. 물론 그게 가능할지는 확신할 수 없다. 카라칼의 첫 책부터가 내겐 쉽지 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기억의 발굴>은 한 여성이 자신의 그루밍 성폭력 경험담을 문학적인 방식으로 써내려간 회고록이다. 10대 여학생이 열다섯 살 연상의 남자 교사와 5년에 걸쳐 성관계를 맺었다. 어린 여성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믿었고, 그 교사는 그 점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 그리고 이 여성은 성인이 되어서야 자신을 괴롭혀온 과거의 일에 대해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했다.


읽을수록 이 논픽션에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처음 원서의 초반부를 읽었을 때 무척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그루밍 성폭력의 기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계약을 진행했지만, 솔직히 지금도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남자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숙제가 내 앞에 놓인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이 책을 계속 읽어나갈 예정이다. 그 과정은 내가 이 책을 택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재차 납득시키는 시간일 것이고, 내가 펴낸 책의 가장 충실한 독자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자신의 독자를 제대로 찾아가기 위해서라도 나부터 먼저 좋은 독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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