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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슨 Dec 16. 2020

<재즈가 된 힙합>을 읽고서야 ATCQ의 찐팬이 되었다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 그들의 음악과 시대에 바치는 러브레터




<재즈가 된 힙합>에 대한 몇몇 피드백을 접했다. 크게 두 부류였다. 감동적이었다는 내용과, 흑인 사회와 랩 음악에 관한 입체적 이야기가 흥미로웠다는 내용이었다. 투팍도 나스도 아닌 A Tribe Called Quest에 관한 책을 내주어 팬으로서 고맙다는 말들도 있었다. 나 역시 고마웠다. 다만 그런 얘길 들으니, 애초에 ATCQ라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계약해 출간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괜히 조금 찔리기도 했다. 나 또한 많은 힙합 팬들처럼 한때 ATCQ를 즐겨 듣긴 했지만, 열혈 팬은 아니었다. 1집, 2집, 3집은 좋아했지만, 4집과 5집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마지막 6집 앨범은 2016년에 발매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4집과 5집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6집도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지만.)


사실 ATCQ의 음악은 현재 유럽이나 일본에서뿐 아니라 미국에서조차 끊임없이 재조명되며 갈수록 새로운 팬이 늘어나는 중이다. 책에서 저자가 플릿우드 맥의 [Tusk] 앨범을 예로 들며 ATCQ의 음악 또한 그들처럼 ‘시대를 앞서갔다’고 말한 바대로, 실제로 2010년을 전후로 미국의 젊은 청자들 사이에서 ATCQ가 한바탕 큰 인기를 끈 뒤 그 흐름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술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에 비해 한국에선 ATCQ가 유독 덜 알려진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에 ATCQ와 함께 활동했던 대표적인 힙합 음악가들, 예컨대 우탱클랜이나 닥터 드레, 스눕 독 등을 떠올려 보아도 그렇다. 그건 어쩌면 랩 음악이 지금껏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팬덤에게, 어떤 방식으로 주되게 수용되고 소비되어 왔는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재즈가 된 힙합>을 계약해서 출간하기로 한 이유가, 단지 ATCQ에 관한 책이라서는 아니었다. 어느 날 한적한 스타벅스에 앉아 이 책의 원서 [Go Ahead in the Rain: Notes to A Tribe Called Quest]를 읽었는데, 시인이자 비평가로서의 정체성을 반반씩 품은 듯한 하닙 압두라킵의 글에 나는 금세 매료되고 말았고 몇몇 단락에서는 말 그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중음악, 그중에서도 힙합 그룹을 다룬 책임에도 내셔널 북 어워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과 같은 문학상들의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이유 또한 납득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건, ATCQ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책의 내용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 작업을 하는 동안 이 그룹의 음악을 주구장창 들으며 결국 나는 ATCQ의 완전한 팬이 되었고, 그들이 단지 ATCQ에 관한 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읽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위대한 그룹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과 함께한 시간을 통해 ATCQ의 음악이 어째서 여전히 독보적이고, 특별하며, 시대를 앞서갔는지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쓴 하닙 압두라킵에 대해서도 거듭 감탄하게 되었다. ‘애정을 근간으로’ 글을 쓰는 비평가답게, 그는 자신의 지식과 통찰을 전시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먼 문장들로 아름다운 비평을 선보인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가 이 책에 대해 “감정 없는 분석을 지향하지 않고, 논리적이고 정연한 태도와 거리를 둔다”고 말한 근거가 선뜻 이해되는 부분이다. 음악과 음악가에 대해 이러한 글을 쓰는 다른 작가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음악 이야기인 동시에 사랑 이야기인 문학책은 흔치 않고, 그만큼 이 작가의 이 책은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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