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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슨 Jan 15. 2019

<아만다 녹스>를 봤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20대를 온통 암흑뿐인 시간과 맞바꾼 여성이, 이제야 겨우 자신을 되찾고 치유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만다 녹스>는 살인죄 판결을 받고 이탈리아 교도소에서 근 4년을 복역한 미국 여성 아만다 녹스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살인 사건을 다룬 범죄물이기도 하지만, 스물이라는 나이에 하우스메이트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10년 가까이 고통받아야 했던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듦새에 있어 흥미로운 점은, 사건의 주요 당사자들이 직접 출연해 내러티브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아만다 자신을 비롯해, 공범 혐의를 받은 당시 남자친구 라파엘레 솔레치토, 사건을 가까이서 취재한 영국 기자 닉 피사, 그리고 자기 멋대로 수사를 이끈 이탈리아 검사 줄리아노 미니니 등이 카메라 앞에서 저마다의 입장을 가감 없이 쏟아낸다. 여기에 경찰의 자료 화면과 언론들의 취재 자료, 아만다 녹스 본인이 제공한 영상이 더해져 서사의 밀도를 높인다. 이 덕에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다큐멘터리가 됐다.


영화를 통해 목격하게 되는 비극의 시발점은 크게 두 가지다. 세계의 이목을 끈 살인 사건을 눈앞에 두고 성과주의에만 매달린 관할 수사 당국과, ‘불여우’와 같은 수식어를 써가며 자극적인 기사를 찍어낸 황색 언론이 그것이다. 그들은 아만다 녹스가 사건 현장이나 법정에서 보인 몇몇 특이한(지나치게 무덤덤했다거나 웃음을 지었다는) 행동이 범죄와 연관 있을 것이라 짐작했고, 그것을 자기 논리의 근거로 삼았다. 용의자나 피해자다운 표정이나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에 의심을 살 만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희대의 악녀’라는 낙인을 완전히 떼어내지 못한 아만다는 얼마 전 <마리끌레르>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피해자의 행동은 어딘가 다를 거라 생각하지만, 이는 추측에 기인한 편견일 뿐이다. 친구가 살해되거나 자신이 성폭행당했을 때 마땅히 보여야만 하는 ‘정상적인’ 반응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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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다 녹스>를 보며 최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비슷한 장면이 떠올랐다. 2017년 9월, 고 김광석의 전 부인 서해순 씨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한 뒤 그의 발언과 행동이 큰 이슈가 되었다. 앵커의 질문에 횡설수설 답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게 호사가들의 요지였다. 적잖은 이들이 ‘서해순이 김광석을 죽였다고 단정짓는 건 우려스럽지만, 그가 보인 말과 행동이 이상한 건 사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남편을 잃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뒤늦게 해당 인터뷰를 찾아본 나는 좀 갸우뚱했다. 서해순은 다소 산만하고 정신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가 언급한 내용만큼은 일관적이었으며 그다지 수상한 구석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건, 만만해 보이는 중년 여성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가혹한 태도였다. 영웅주의에 젖어 서해순에게 살인 혐의를 씌우려 한 이상호 기자를 보면서는, 15년 전 단둘이 화상 채팅까지 해가며 그의 팬임을 자처했던 나로서 참담한 기분까지 들었다.


손쉬운 편견에 발을 담그고 나면, 그 이후부턴 추측도 욕도 모든 게 수월해진다. 구글이나 유튜브로 검색해보면 여전히 아만다 녹스를 악마화하며 사이코패스로 몰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가 지난 시간 고통받은 경험을 책으로 펴내 돈을 벌고 방송에 출연한 걸 두고서도 비난을 퍼붓는다. 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20대를 온통 암흑뿐인 시간과 맞바꾼 여성이, 이제야 겨우 자신을 되찾고 치유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여론 재판의 한가운데로 떠밀려 들어가는 기분이 어떤 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당사자가 여성이라면 더 그렇다. 다만 짐작건대,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아만다는 그 끔찍한 시간에서 조금씩 벗어나 다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가려 애쓰는 중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를 끝까지 응원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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