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최후의 만찬이 되었을 나의 파리바게트

쓰고 고요했던 오후, 그날의 커피처럼

by 에스더리


내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식사를 했다.



커피는 평소보다 썼고, 곁들인 빵과 샐러드는 아주 천천히 넘겼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혼자 입원 수속을 밟고, 간호스테이션에 “식사하고 와서 환복 할게요”라고 말하고 나온 길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차들과 거리의 풍경이 유독 정겹게 느껴졌다.


집에서 챙겨 온 것은 칫솔, 로션, 수건,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께 매달리며 적어 내려간 성경 필사 노트 몇 권뿐이었다.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이 그 노트라고 생각했다.



이 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애써 밀어내지 않았다.

도망치듯 꾸역꾸역 먹고 싶지도 않았다.

몇 분이라도 오롯이 평안함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옆자리 사람들은 화기애애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고,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인 척 여유롭듯이 앉아 있었다.


그날은 뇌수술을 앞둔 날이었다.


머릿속 꽈리가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위험한 진단.

전신마취와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하는 수술.

깊숙한 위치라 쉽지 않은 수술이라는 교수님의 말씀.


과거 중환자실에서 일하며 봐왔던 수많은 죽음의 문턱, 사고로 혹은 중병으로 깨어나지 못해 호흡기를 끼고 누워 있던 중환자 분들을 케어하면서 나는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이런 일은 나에게 벌어지면 안 돼, 그럴 바엔 차라리 호흡기를 떼버리겠어"라고 다짐하며 연명치료 중단서약은 물론, 사체기증 서약까지 해놓았던 나인데,


그 일이 이제 내 차례가 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비현실적인 담담함으로 머리와 가슴을 뒤덮었다.

내친김에 나에게 기분 좋은 오후를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

그날은 기도도 길지 않았다.

밤낮 울며 매달렸던 시간 끝에 하나님이 수술을 허락하셨다는 확신이 들자, 어느 순간 공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술비 보험금으로 채권자들에게 돈을 조금이라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안도감이 들 정도였다. 내게는 숨이 멈추는 것보다 채권 추심이 더 괴로웠으니까.




2017년, 내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모든 실물 자산들과 문서들을 눈으로 확인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가 터지고 나서 회장이라는 사람이 전과 11범 임을 알게 되었다.

서초동 전세금과 지인들의 돈까지 20억에 가까운 투자금을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았다.


경찰서와 법원을 오가며 가마솥 같던 무더위에 아이들에게 5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 사줄 돈이 없는 비참한 세월을 보냈다.


우리 집에서 일하시던 이모님의 도움으로 나도 남의 집 가사도우미 일을 하게 됐고 일하며 주워온 음식으로 아이들을 먹였다.


그 와중에도 길가에 계신 노숙자 아저씨를 지나치지 못했다. 아이들 주려던 새 단팥빵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가방에 넣고 안 본 척 스쳐 지나가다 결국 다시 돌아가 건네드리고, 빈손으로 돌아오며 속으로 울었다.

나는 왜 이리 바보 같은지. 내가 지금 남 생각할 처지인가..


밑으로 밑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내 모습에

지친 남편은 욥의 아내처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차라리 저주하고 죽어라” 했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러는 같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베드로 같았고, 야곱 같았다. 성경의 인물들이 내 삶에 대입되기 시작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역설적으로 성경이 이해되었고,

가장 괴로운 순간에 평안을 느꼈다.

하나님을 원망했다가 5분도 안 되어 다시

그분을 찾는 과정을 반복하며,

조금씩 더 하나님께 스며들었다.

공포와 괴로움과 자괴감을 성경 필사를 하며 반사시켰고 기도로 내 마음을 지켜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도 주를 찾기에 얼마나 갈급했던가.


하나님과의 씨름 그리고 내려놓기

그로부터 몇 년 후, 천장이 빙빙 도는 극심한 어지러움증과 두통에 시달리다가 진료받던 중 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복은커녕...

하나님은 내게 고통의 과정을 다양한 방법으로 오롯이 다 겪게 하셨다.

아무도 돕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없이 또 오직 그분과만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촘촘한 기도의 시간이 쌓였기에, 수술 전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나는 구차한 간구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지금까지의 시간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싶었을 뿐이다.

사실 내가 끝까지 내려놓지 못했던 '나의 베냐민(가장 끝까지 움켜쥐고 싶었던 존재: 가족)'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평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날의 식사가 내게는 진정한 '최후의 만찬'이었다.


다음 날, 나는 수술대에 올랐다.

마취 전, '신의 손'이라 불리는 교수님께 부탁드렸다.

“저를 위해 기도 한 번만 해주세요.”

교수님은 흔쾌히 기도를 해주셨고, “마취 들어갑니다”라는 말과 함께 나는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다음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침식사'를 병동에서 맞이했다.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다.




지금도 가끔 그날의 커피 맛을 떠올린다.

그 창 밖의 풍경, 오가는 사람들.

쓰고, 조용했던 오후.

죽음을 생각하며 먹었던 그 한 끼는, 이상하게도 지금의 나를 살게 한다.


그리고 그곳은 기억에서 꺼내기 힘든 곳이지만, 오히려 힘들 때 찾아가 힘을 받는 곳이 되었다.




양재동 파리바게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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