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만개했다. 작년엔 활짝 핀 벚꽃을 보기 위해 공원으로 나갔다. 공원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벚꽃놀이를 나와 있었다. 한가로이 벚꽃을 보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천천히 꽃길을 거닐며 벚꽃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어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인, 가족과 함께 나와 웃음 가득한 얼굴이었다. 홀로 벚꽃놀이를 나온 이는 나 하나뿐이었다.
문뜩 어떤 글이 떠올랐다. 몇 해 전 인터넷에 떠돌던 짧은 글 ‘애인을 어디서 만나 어떻게 사귀는 걸까?’라는 글. 지하철에서 알콩달콩한 연인을 바라보던 20대 후반의 여성이 쓴 글로 당시 그 글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렵다. 특히나 사적인 관계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사회적으로 혼술, 혼밥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혼자의 시간이 강조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혼자’인 것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때로는 동정의 시선을 보내고 때로는 노력하지 않은 젊음으로 치부시켜버린다. 결혼 적령기를 넘겨버린 노처녀,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비혼 주의를 외친 노총각, 그들은 실패한 인생, 포기한 인생으로 분류되며 눈총을 받는다. 시대를 넘겨준 이전 세대의 문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뿌리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젊은 세대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혼 적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이로 인해 결혼정보 회사가 부흥했다. 교회나 성당을 가면 그 시기의 젊은이들이 몰려있었다. 오죽하면 부모들까지 교회를 나가보는 건 어떠냐는 어드바이스가 있었다. 전형적인 틀 속 삶을 살아야 성공한 인생, 화려한 인생으로 비쳤다.
다행히 요즘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타이틀이 강조되며 각자를 존중하는 삶으로 변해가고 있다. 인권 운동이 활발해지며 ‘개인’에 대한 인식도 변화한 것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던 남성, 여성 간 차별 문제가 점점 심화됐고 고여 있던 상처와 흉터들이 터져 나오며 인간의 기본 권리와 이성, 본능이 중요한 개념이 됐다. 특히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기반으로 형평성 있는 권리를 추구한다는 페미니즘 확산으로 개인과 인권은 가치가 높아졌다. 물론 일부 과거에 얽매여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잠깐이라고 믿고 있다.
퓨전 사극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초반 “꽃은 꽃일 뿐 뿌리가 될 수 없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꽤나 그럴듯하지만 꽃을 꽃으로만 바라보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잘못된 것도 아니다. 하나의 방법이고 하나의 시선이다. 모든 시선이 한 곳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 TV 채널도 100개 넘는 시대지 않은가? 이제는 각자의 채널과 재미요소, 추구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