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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혁 Jun 11. 2021

그때 그 못난이 9화

얼레리 꼴레리 따위 받아들이겠어

평소 병찬이가 부러웠었다. 병찬이는 미소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예전부터 그랬다. 저학년 때부터 미소가 좋다며 말하고 다녔다. 이미 학교에서 알만한 사람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놀리던 말던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온천하에 드러냈다. 물론 처음엔 아이들이 놀려댔다. 유치한 얼레리 꼴레리와 손가락질을 했으나 병찬이는 당당하게 "맞아. 나 미소 좋아해."라며 반응했고 때론 주먹다짐을 해가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성을 좋아하는 감정에 서툴렀고 창피해했던 나와 그 시기의 우리는 감정을 숨기기 급급했다. 우리가 감정을 미약하게나마 들어낼 수 있는 방법은 익명의 인기투표에서였다. 선생님들이 노총각, 노처녀여서 초등학생 이성 놀음까지 심취했던 거 같다. 


그날도 그랬다. 점심시간 중간에 선생님은 인기투표를 하겠다고 말했고 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싫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초딩다운 심리랄까? 

"어차피 남자는 진호가 또 1등이야."

"그렇겠지. 진호 다음으로 상수가 많을 거고."

우리 남자아이들 무리는 모여서 어차피 진호와 상수가 몰표를 받을 거라며 퉁명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반면에 여자 아이들은 누구에게 표를 던질지 열띤 토론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도 참 여자와 남자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오~"

선생님이 교탁에서 종이를 하나씩 꺼내며 이름을 호명했다. 반장이 칠판에 이름과 숫자를 새기는데 의외의 이름이 나올 때면 감탄사가 교실을 울렸다. 

"재선이 좋아하는 애가 누구지?"

"그러게 재선이 이름 나오는 거 처음 봤어."

"이거 내 이름도 나오겠는데?"

"너, 너 이름 써서 냈냐?"

"아니거든!"


계속 떠들며 인기투표가 진행되는데 여자는 참 알기 쉽다고 생각했다. 남자아이들은 '오~, 오~'거리며 감탄사를 내뱉는데 여자 아이들은 자신이 적은 남자아이 이름이 불려지면 얼굴을 붉혔다. 살짝 미소를 짓기도 했다. 속으로 저것들은 바본가? 싶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남자아이들 역시 모자라보였다. 


"자, 이제 두장 남았네. 여기에 적힌 건 누굴까?"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남은 두장에서 대충 접힌 종이를 꺼내 이름을 불렀다. 

"김미소."

칠판엔 새로운 이름이 새겨졌다. '김미소', 안 봐도 뻔했다. 병찬이가 적어 넣은 거다. 미소는 남자아이들과 여장 아이들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오래전부터 병찬이가 열렬히 애정을 갈구한 탓에 '미소=병찬'이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자, 그럼 다음은 마지막 남은 한 장. 누굴까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은 자체 효과음을 냈다. 겹겹이 접힌 종이를 펴내는데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다들 숨죽인 채 종이를 바라봤다. 아마 다들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길 바랬던 거 같다. 원래 같잖은 희망은 마지막에 부풀어 오르는 법이니까. 


"인기투표 누구 적었었어?"

"비밀인데 그걸 왜 물어봐."

"뭐 어때, 나도 말할 테니까 너도 알려줘."

청소 시간이 되자 여기저기서 투표자의 행방을 가렸다. 

"난 진호 썼어. 너는?"

"나는 아라."

"너 아라 좋아해?"

"아라는 첫 번째로 좋아하고 은희를 두 번째로 좋아해. 세 번째는 수경이."

"나는 진호가 첫 번째, 상수가 두 번째, 세 번째는 아직 없어."

멍청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우리나라가 왜 일부다처제였다는 걸 쉽게 이해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순서를 매긴다. 여자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유교사상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는 일처다부제가 되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했다. 


"넌 누구 썼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경이 무리가 투표자 행방을 가리고 있었는데 수경이가 못난이에게 물어보는 소리가 귓속에 날아와 박혔다. 소머즈가 되겠다는 세뇌를 걸며 귀를 곤두세웠다. 

"음, 비밀."

"에이, 그런 게 어딨어? 누구 좋아하는데 말해봐."

과학시간에 들었던 이론을 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 심장은 왼쪽에 있다는 걸 그때 알아챘다. 못난이의 입술이 슬로 모션으로 벌려졌다. 

"사실은 상수 썼어."

"너도 상수 좋아해?"

"응, 상수를 첫 번째로 좋아하고 두 번째는 승혁이 좋아해."


못난이는 역시나 멍청이였다. 좋아하는 사람에 순위를 매기는 그 멍청이들과 같았다. 

"왜 웃어?"

"응? 안 웃었는데."

"너 방금 웃었는데?"

나도 멍청이였다. 얼굴을 붉히고 살짝 미소를 머금는 그 멍청이가 나였다. 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멍청이는 금세 감정을 뒤바꿨다. 

"청소 좀 잘해!."

벌떡 일어나 성질을 부리며 못난이 엉덩이를 밀치며 지나갔다. 못난이는 그대로 꼬꾸라졌고 못난이와 주위 패거리들은 육두문자를 날렸다. 


'상수가 첫 번째라니.'

첫 번째가 되지 못한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심술로 변질됐다. 심술이 똬리를 틀고 무럭무럭 자라나게 된 날, 나는 결심을 하나 하게 됐다. 병찬이처럼 해보자는 결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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