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때문에 학교 전체가 들썩였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한동안 개학이 연기되었다. 2021년에는 온라인 수업과 쌍방향 수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코로나19의 영향은 2022년에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우리 반에도 코로나19 때문에 못 오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서 적을 땐 1~2명, 많을 땐 4~5명이나 학교에 오지 못했다.
언론매체를 통해서 오미크론 변이는 증상이 심하지 않다는 소식을 수시로 들은 탓이었을까. 아이들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어도 사실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아이들도 한 주 후에 평소처럼 학교에 다시 나왔고, 금세 평범한 모습으로 생활했다.
‘모두가 코로나19에 걸려도, 마지막까지 걸리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
그게 우리 가족, 또 내가 되길 내심 바랐다. 그런데 얼마 전, 아내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코감기 증상이 심해서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왠지 불길했다. 집에 돌아와서 얼른 자가 키트로 검사를 해봤다. 이후 15분간 숨죽여 결과를 기다렸다.
선명한 두 줄이었다. 양성 판정. 이후, 세 식구가 병원에서 모두 신속 항원 검사를 받았다. 아내와 딸아이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틀 후, 나 역시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의 자가 격리가 시작되었다.
평소 밖에 나가는 것보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강제적으로 외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니, 몹시 답답했다. 분명히 언론매체에서는 감기처럼 아프지 않다고 했는데, 콧물, 두통, 인후통까지 생각보다 증상이 심했다. 요즘은 누구나 걸리는 코로나19 라지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진 않았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얼마나 당황스러웠니? 몸은 좀 괜찮아? 생각보다 많이 아프구나. 네가 아프다고 하니, 나도 속상하다. 힘내고 우리 곧 즐겁게 곧 보자.”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응원의 말들이 듣고 싶었다. 나는 아프고 힘든데, 바깥세상은 평소처럼 흘러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 상황을 얘기해 볼까? 아냐, 괜한 동정은 받고 싶지 않아.’
내가 얼마나 마음이 어려운지, 또 몸이 아픈지도 모르면서 어줍지 않게 위로하는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친한 친구 몇 명이 떠올랐다. 연락을 할까 말까 몇 번 망설이다가, 관두기로 했다. 물론 그 친구들에게 말했다면 나를 위로를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들도 코로나19에 걸려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 마음을 또 몸 상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에 상대방의 마음을 얼마나 잘 이해했을까?’
얼마 전 친한 친구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회사 생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10년 후, 20년 후에도 계속 일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워. 회사를 그만두면 난 뭘 해야 하지? 생활비는 어떻게 벌고, 또 아이는 어떻게 키우고.”
“우리 그래도 아직 젊잖아. 너무 걱정만 하지 마. 너는 너만의 기술도 있고, 실력도 있잖아. 오래도록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친구를 위로한다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직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계약직으로 근무하거나, 연봉을 조금 받아서 어려워하는 친구들도 있잖아. 그런 친구들에 비하면 너는 연봉도 많이 받고, 정규직이고, 회사도 잘 알려져 있잖아. 너 어디 가서 지금처럼 그런 소리 하지마. 애들한테 욕먹어.”
“아냐 나도 정말 고민이 많아서 그래. 공무원이라 정년이 보장되는 너는 내 마음을 모를 거야.”
내가 발끈하며 말했다.
“공무원은 철밥 통이라 고민도 없는 줄 아니? 나도 교사 생활을 정년까지 할 자신 없다고. 나도 너처럼 교직 생활하면서 어려운 점도 많고.”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흐지부지 우리 대화가 끝났다. 코로나19에 걸리고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때, 문득 그때 통화한 것이 떠올랐다. 대학 졸업 후에 나는 바로 교사가 되었고, 다른 직장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런 내가 친구의 상황을 잘 아는 것처럼 섣불리 말해버린 것이 민망하고 미안했다.
‘상황을 제대로 겪어보지 않으면,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구나...’
내 잣대로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거나, 상대방의 상황을 쉽게 아는 척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상황을 겪어봐야 하는 걸까. 또 그게 가능할까. 그러면 모르는 일에 관해서는 대화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고민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음... 그럴 때는 어쭙잖은 조언은 삼가고, 묵묵히 들어주는 편이 더 낫겠다.’
그들이 바라는 것도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공감이었을 테니.
이전에 학교에 있을 때, 코로나19 자가 격리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있었다. 한 주간 자가 격리 후에, 아이들이 등교할 시기가 되면 학부모님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었다.
“우리 아이가 오랜만에 학교에 가려니 긴장되나 봐요.”
그럴 때마다 내가 말했다.
“그렇게 얘기하던가요? ○○이는 잘할 거예요. 긴장하지 말고 가벼운 맘으로 교실로 오라고 전해 주세요. 저도 ○○이를 더 유심히 지켜볼게요.”
쉽게 그렇게 말했던 내 입이 부끄러웠다. 막상 한 주를 쉬고 돌아가려니, 담임교사인 나조차도 마음에 부담이 큰 탓이다.
‘아이들에게는 내 상황을 자세히 말해줘야 하나. 밀린 수업 진도는 언제 어떻게 나가지. 또 아이들이 그동안 맘이 확 풀어진 건 아닐까. 다시 분위기를 꽉 잡아야 하나.’
어른인 나도 이렇게 생각이 많고 긴장되는데, 아이들은 어땠을까. 그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또 격리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개인적으로 다가가서,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말조차 건네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역시 그 상황에 처해봐야 상대방의 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구나.’
학교에 돌아가면, 전보다는 상대방이 건네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학부모의 민원도, 아이들이 건네는 말들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흘려듣지 않게 되리라.
역시 사람은 아픈 만큼 성장하는 것 같다. 물론 아프지 않을 수 있었다면 더 좋겠지만. 뜻하지 않게 걸렸던 코로나19로 인해서, 조금은 성장한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동안 학교에서는 또 우리 반 안에서는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다시 심호흡을 크게 하고 교실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