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를 앞둔 아이들은 반 배정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갖기 마련이다. 물론 담임교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있던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제비뽑기로 학급을 결정했다. A반, B반 등으로 아이들을 미리 나눠 학급을 만든 후, 선생님들이 알파벳을 뽑는 식이었다.
전년도 학생 명부에 ‘생활’이라고 적힌 아이들이 있었다. ‘생활’은 ‘생활 지도가 필요한 학생’이라는 의미였다. 작년 담임 선생님들이 특별히 지도가 필요한 학생을 표시해 놓은 것이다. 다음 담임교사를 배려하기 위해 적어놓았다지만, 나는 '생활' 표시가 적혀 있는 명부를 볼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낙인찍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간사하게도 나는 그 아이들이 우리 반에 배정되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몇 해 전 만난 A도 ‘생활’ 표시가 붙은 아이였다. A는 첫날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자기소개 시간, A의 차례가 되자 터덜터덜 교실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고 다른 친구들을 노려보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 나는 있잖아. 내 이름은 A야. 내가 무슨 말부터 하려고 했지? 아 맞다. 생각났다. 나는 작년에 0반이었어.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러니까 내 말은...”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종잡을 수 없는 A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A의 모습을 보며, 전 담임 선생님이 왜 그 표시를 붙여 놓았는지 이해가 갔다.
일주일 후, 학급 회장 선거가 있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A가 본인을 학급 회장 후보로 추천한 것이다. 나는 ‘혹여나 친구들이 장난으로 투표해서, A가 회장으로 당선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진지하게 투표한 덕분에 A는 달랑 1표만 받고 낙선했다. 선거가 끝난 후에 혼잣말을 하던 A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회장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친구들의 마음을 얻어야지. 네가 어려운 친구들도 도와주고, 학급에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친구들이 널 뽑아주지 않을까?”
A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욕도 잘하고 화가 나면 손부터 나가는 A가 모범적인 학생으로 변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날 이후로 A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소외된 친구가 보이면 기꺼이 친구가 되어 주었고, 교실에서 말다툼이 벌어지면 젤 먼저 나서서 중재했다. 평소에 잘하던 욕도 하지 않고,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A의 변한 모습에 친구들도 금세 마음을 열었다.
시간이 흘러 2학기 학급 회장을 뽑는 날, A는 당당하게 우리 반 학급 회장이 되었다. A가 친구들에게 인정받아 학급 회장이 된 사실이 놀랍고 대견했다. 사실 A는 부모님과 형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학생이었다. 그보다 2살 많은 형은 집에서 종종 그를 때렸고, 부모님은 형제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방치했다. 그런 탓에 A는 집에 가기 싫다는 이야기를 내게 자주 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학교에서 친구들을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A가 안타깝고 또 기특했다.
A를 보며 예전에 읽은 책 <바보 빅터>가 생각났다.
<바보 빅터>는 IQ 173인 빅터의 실화를 담고 있다. 교사의 실수로 빅터의 IQ가 73이라고 잘못 소문이 나는 바람에 그는 무려 17년간 바보로 살게 된다. IQ 73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무시했고, 그는 중학교도 중퇴한 채 자신을 끊임없이 비하하고 깎아내린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는 본인의 실제 아이큐가 73이 아닌 173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에 그는 멘사 회장이 되는 등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문득, 지금까지 ‘생활’ 표시를 달고 우리 반에 왔었던 많은 아이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나도 ‘생활’ 표시가 붙어 있다고, 학생들을 섣불리 낙인찍은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이어지자 문득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생활' 표시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선입견 없이 학생들에게 다가가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학교에서 학기 초에 그런 표시를 적어놓지도 않지만.
우리는 자주 선입견을 가지고 타인을 대한다. 외모나 평판, 첫인상 등으로 쉽게 단정해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상대의 진면목을 발견할 귀한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 모두 편견을 거두고 상대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