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밤 10시에 뜬금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급히 발신자를 확인했다. 우리 반 A의 어머니라는 걸 확인한 순간, 온갖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A가 따돌림을 당했는데, 내가 혹시 알아채지 못한 건가? 아니면 혹시 오늘 내가 A에게 상처가 되는 심한 말을 했었나? 아니면 A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나?’
불안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달래며 심호흡을 했다.
“A 어머니, 안녕하세요?”
“선생님, 내일 준비물이 있나요? A가 알림장을 제대로 안 적어왔더라고요. 혹시나 급한 준비물이 있나 싶어서 전화를 드렸어요.”
잔뜩 긴장했다가 김이 새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내일 특별한 준비물은 없습니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내가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네, 감사합니다.”
A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 내가 실수를 한 것도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종종 이어졌다. 퇴근을 한 이후에도, 또 휴일에도 사소한 일들로 학부모에게 수시로 문자나 전화가 왔다.
퇴근 후에 휴식을 취하는데, 학부모로부터 학교 일과 관련된 연락을 받으면 기분이 상했다. 통화 시간은 몇 분 되지 않았지만, 학교 일을 계속 떠올린다는 게 영 불편했다.
‘왜 사소한 일로 퇴근 후에 연락을 하는 걸까?’
한참을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원인이 있었다. 학기 초, 학생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학부모님들께 이렇게 안내했다.
"작은 일도 좋으니 학생과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부담 없이 연락을 주세요."
그러니 퇴근 이후에 사소한 일로 연락이 종종 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교사가 학생을 위해서 학부모와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개인적인 삶에 영향을 받는 것은 문제였다. 고민 끝에 선배 교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저는 아이들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싶었을 뿐인데, 퇴근 후까지 연락을 받으니 불편합니다."
"선생님이 학부모와 소통하고 싶은 것은 공적인 부분이고, 퇴근 후에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은 사적인 부분이죠. 그런데 공적인 부분이 사적인 부분을 침범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던 것은 아닐까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맞아요. 학부모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싫지는 않은데, 제 사적인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고 연락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덧붙여서 작은 일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퇴근 시간이나 휴일에는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떨까요?"
나는 잠시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학기 초에 언제든지 전화를 해도 좋다고 이야기했었거든요. 전화를 받지 않으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학부모 상담에 관한 선생님만의 규칙을 만들어서 학부모에게 다시 한번 전달하면 어떨까요?"
거의 대부분의 직업에 명확한 근무 시간과 규칙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몸이 아프다고 의사에게 아무 때나 불쑥 전화를 하지 않고, 배가 고프다고 새벽에 음식점 사장에게 전화를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설정해 놓은 '근무 시간'이 있고, '근무 시간 이외에 연락을 따로 받지 않는다'라고 그들이 정한 분명한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연락 가능한 시간과 방식을 구체적으로 안내하지 않았던 것이다. 해결 방법을 깨달은 나는 규칙을 적은 안내장을 발송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학생의 학교생활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실 경우에는 문자나 전화를 주시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평일 근무시간 중에 문자 주시면 가능한 시간에 문자 또는 전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평일 근무시간 이후와, 공휴일에는 개인적인 사유로 연락을 받지 못합니다. 퇴근 이후의 제 개인적인 시간에는 가정을 돌보고, 스스로 휴식을 하며 몸과 마음을 재충전해야 하기에 연락을 받지 못합니다. 일과 시간 이후에 연락을 받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새롭게 규칙을 마련한 이후에는 퇴근 시간 이후에 업무 관련해서 연락이 많이 줄어들었다. 우려했던 것처럼 학부모와의 관계가 크게 틀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퇴근 이후, 나만의 시간을 보장받은 덕분에 스트레스 없이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때론 상대방에게 내 생각과 주장을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학부모의 반응이 두려워서 휴일이나 근무시간 이후에도 전화를 계속 받았다면 어땠을까? 스트레스로 인해서 결국엔 학부모와의 관계도, 학생과의 관계도 틀어져 버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경계를 잘 세우는 일은 나를 위함과 동시에 상대방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오래도록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경계가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