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괜찮아샘 Nov 16. 2021

직장에서 필요한 거리 두기

내 일? 네 일!

학교에서 필요한 거리두기

"전교 학생회에서 쓰레기통 설치 이야기가 나온 거죠? 그러니까 관리도 전교 학생회에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행정실 주무관의 말이 내 귀에 꽂혔다. 내 생각을 말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겠다고 하고는 교실로 돌아왔다.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9월 어느 날, 2학기 전교 학생회 임원 선거가 있었다. 며칠 후, 교장 교감 선생님을 모시고 새로 뽑힌 전교 학생회 임원들과 간담회를 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전교 학생회장인 A에게 질문을 하셨다.


"학교생활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나요?"


A가 잠시 고민하더니, 답변을 했다.


"야외에 쓰레기통이 없어서 불편해요. 쓰레기통을 설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교장 선생님께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야외에 쓰레기통이 있으면, 외부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관리가 잘 안돼요. 쓰레기통 주변이 더러워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설치를 안 했던 거예요. "


전교 회장인 A가 어렵게 꺼낸 이야기를 바로 거절하는 게 머쓱했는지, 교장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학생들이 원하면 설치를 한 번 해볼까요? 관리가 잘 안되면 그때 다시 철거를 하더라도요."


교장 선생님께서 고심 끝에 허락을 하셨다. 실무적인 일은 학생자치회 담당 교사인 내가 맡아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바로 행정실장님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행정실장님이 말했다.


"선생님께 학생 참여 예산제 예산이 있으니까, 그 예산으로 쓰레기통을 구입하면 어떨까요? 학생회에서 나온 의견이니까 그렇게 하는 게 아이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몇 해 전부터 도 교육청에서 '학생 참여 예산제'라는 사업이 신설되었다. 학생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학교 사업을 진행하라는 것이었다. 사업비도 넉넉하게 책정이 되었다. 쓰레기통을 살만한 돈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통은 학교 시설이니까, 행정 사항 아닌가? 학생회 담당 교사가 쓰레기통까지 구입해서 설치해야 하나?'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알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전교 학생회장으로부터 나온 의견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다가, 일을 떠넘기는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쓰레기통을 구입해서 설치하는 것은 번거롭지 않았다. 며칠 후 행정실에 직접 찾아가서 B 주무관에게 말했다.


"야외 쓰레기통 관리는 행정실에서 맡아 주시는 거죠?"


평소에 학교 청소를 해주시는 분이 두 분이나 계셨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답변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그분들께 계약서상에 명시된 것만 부탁을 드릴 수 있어서, 야외 쓰레기통 관리까지 부탁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학생회에서 나온 얘기니까 학생들이 관리하면 어떨까요?"


당황스러웠지만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알겠다고 하고는 우선 교실로 돌아왔다. 우리 반 교실에 오니 그제야 아까 전에 하고 싶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면 학생회 업무에는 야외 쓰레기통 관리까지 하도록 명시되어 있나요?"


교실에서 혼자 이 말을 몇 번 반복했다. 후회가 되고 분했다. 행정실에 가서 다시 이 말을 할까 생각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청소를 담당하시는 교육 공무 직원분들의 청소 구역이 이미 정해져 있고, 그분들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가 갔기 때문이었다. 그냥 올해는 내가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단 쓰레기통 문제뿐만 아니라, 학교에는 여러 부서가 서로 얽혀있는 일들이 많다. 저 경력 교사 시절, 학교에서 안전 교육 업무를 담당할 때였다. C 교감 선생님이 전화로 나를 찾았다. 교무실에 찾아가니, C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학교에서 매월 4일에 안전 점검을 해야 해요. 선생님이 안전교육 담당이니까, 전교 학생회 임원들을 데리고 직접 안전 점검을 하면 어떨까요?"


내가 C 교감에게 물었다.


"안전 점검은 그동안 행정실에서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전교 임원들은 학생 자치회에서 담당하고 있고요."


내 일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나에게, C 교감이 야박하다는 듯 말했다.


"행정실 시설 담당자가 그동안 안전 점검을 했던 건 알아요. 그리고 학생 자치회 담당 교사가 따로 있는 것도 알고요. 내 일 네 일 나누지 말고 서로 도우면서 하면 좋지 않을까요?"


"네. 교감 선생님, 그럼 제가 해볼게요."


교실로 돌아가서 매월 4일에 안전 점검을 하겠다는 계획을 기안으로 작성하였다. 결재를 위해 전자 문서로 기안을 올렸는데, 안전 부서 부장 교사인 C가 나를 찾았다.


"선생님, 안전 점검은 시설 담당 업무인데요. 왜 선생님이 하려는 거예요?"


"행정실 주무관님 일도 많으니까 같이 도와서 하려고요. 매달 한 번씩 조금만 시간을 내면 되니까 제가 열심히 해볼게요."


열심히 하겠다는 내 얘기에도 C 부장 교사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하겠다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씁쓸한 표정은 뭐람?'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돕는 것으로 시작을 했지만, 그날부터 안전 점검 관련 업무는 완전히 내 업무가 된 것이다. 안전 점검과 관련된 공문이 오면 모두 내게 배정이 되었다. 처음에는 도우려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내가 맡기로 한순간부터는 돕는다는 말은 사라져 버렸다. 완전하게 내 일이 된 것이다.


물론 근무시간 내내 행정 업무만 처리할 수 있다면, 수많은 일을 맡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담임을 맡고 있기에 근무시간 중 쓸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었다. 업무에 시간을 할애한 만큼, 수업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내가 한 번 일을 맡으면 그게 선례가 되어서, 내년도에 이 업무를 맡는 사람도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다른 사람의 업무를 맡는 것은 쉽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다시 넘기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거절을 잘 못하는 내게 잡무들이 많이 넘어왔다. 친목회나 체육 업무를 맡지 않았음에도, 관계가 전혀 없는 '교내 교직원 탁구 대회 계획 및 진행' 도 맡았다. 개인적으로 탁구를 좋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잡무에 시간과 노력을 쓴 만큼, 체력도 에너지도 소진이 되었다. 정작 중요한 우리 반 학생들에게 할애해야 할 시간과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그 이후로 '내 일'과 '네 일'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야박하더라도 내 일이 아닌 것에는 어느 정도 선을 긋고 거절 의사를 밝히려고 했다. 한동안 잘 지켜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학교에서 마음을 놓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들어온 '야외 쓰레기통' 문제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학교에서 근무하며 '우리는 교육 가족이다'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한때는 실제로 같이 근무하는 모든 동료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가족 간에는 경계도 없고 내 일, 네 일 구분도 없지 않던가? 그러나 직장 동료가 가족이 될 순 없었다.


정서적으로는 친밀함이 필요했지만, 이성적으로는 매 순간 어느 정도의 거리 두기가 필요했다. 잠깐 허점을 보이는 순간, 그 허점을 타고 잡무들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학교에서 동료들과 존댓말을 주고받으려 한다. 어느 정도의 선 긋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10년 정도 근무하면 업무도 학생 지도도 능숙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미숙함 투성이다.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 할 말을 제때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이불을 차며 끙끙 앓기도 한다.


거절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방법도 중요하다. 최소 1년 이상 얽히고설키며 함께 지내야 할 사람들이기에, 거절하더라도 최대한 기분이 상하지 않게 말하는 게 중요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을 잘할 수 있을까? 몇 년 전에 같이 근무했던 D 선생님께 비법을 물은 적이 있다. D 선생님이 넌지시 내게 말했다.


"찜찜하고 곤란한 상황이라면 '잠깐 생각해 보고 이따가 말씀드려도 될까요?'라고 말해 보세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답변을 하면 잘못된 답변을 하기 쉽거든요. 한 번 하겠다고 내뱉은 말을 뒤집기도 곤란하고요. 편안한 자리로 돌아와서 혼자서 충분히 생각해 보면 어떤 상황인지 파악도 잘되고 해야 할 말도 정리가 잘 될 거예요. 그 후에 조용히 찾아가서 거절을 하면 돼요"


즉답을 피하고 우선 여유 시간을 만들라는 그녀의 조언이 이후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녀의 조언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직장 생활을 하는 모두에게 필요한 말이 아닐까?


과거에는 직장에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Yes'만 외치며 지냈다. 그런데 직장에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물론 항상 'Yes'를 말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겠지만, 나와 우리 반 학생들에게 피해가 간다. 능숙하게 거절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정확히 구별하고,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직장 생활의 첫걸음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학교에 놀러 오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