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6일 간병사로 시작
내 인생에 변화가 왔다.
간병을 해도 고달프기만 하고 돈이 되지 않았는데 드디어 조금씩 경제상황이 진정되는 느낌이다.
어느 땐 월 카드 총 상환 금액이 900만 원이 넘는 달도 있었다.
24년 12월은 카드 결제 금액이 500만 원 정도 된다. 이 정도만 되어도 숨이 쉬어진다. 게다가 올 12월 13일 내 생애 반 이상을 살아온 대전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담센터 정리하여 이삿짐을 싸고 받은 임대 보증금 1500만 원 중 경비 빼고 약 1000만 원 정도가 통장으로 들어왔다.
그야말로 박사 졸업논문을 쓰는 동료들과 비교하며 나도 몰래 학업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컸다. 오직 평택대학원과 상담센터를 오가며 공부하는 게 낙이고 영광이고 숙명으로 여기며, 어려움 속을 헤쳐가야 하는 그분들(내담자)과 함께 근 20여 년이 흘러갔다.
사실 석사 무렵 생긴 척추협착으로 어차피 논문을 쓸 상황이 안되어서 오기를 부리 듯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라는 심정으로 집을 사서 세를 놓으며 노후준비를 하였다.
그것이 옳다 아니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식에게 의지 않고 홀로 독립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때 노숙자로 살던 마흔여섯 살의 나를 잊지 않기로 작정했다. 6개월의 삶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내가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시설에서 살면서 '나는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이었을까?
몸뚱이 하나가 전부이던 시절,
00에 있는 가정폭력 피해자 시설인 여성쉼터에서 3개월을 살다가 생활비를 벌어가며 살기 위해 서울로 가겠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5만 원을 쥐어 주셨다. 그러고 나서 서울 00구 0동에 있는 1366 시설에서 약 1주일 있다가 일자리를 위한 외출이 안되어 다른 여성 시설로 입소를 하여 3개월을 살았었다.
내 인생의 격동기, 눈물로 얼룩진 40대였다.
그런 슬픈 시절은, 내가 국가로부터 도움받고 살 것 인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것 인가? 마음을 다잡아 가며 공부를 시작하였다.
소나무를 보면 상처 있는 곳에 관솔(사전적 의미: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 예전에는 여기에 불을 붙여 등불 대신 이용하였다.)이라는 게 생긴다. 내게 그런 아픔이 있던 사건이 노숙자 시절이다.
자꾸 현재의 삶이 그 시절을 떠올린다. 실은 그건 아닌데도...
북태평양에 베링해라는 데가 있다고 들었다. 갑자기 지구에서 사라지듯, 순식간에 돈은 사라지고 부동산은 하락했다.
오로지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미래도 없고 암울하고 고독하였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간병사, 그분이 퇴원하게 되면서 같이 살게 되었고 어느 순간 어르신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멘털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1년만 버티면 빚이 4000만 원 정도는 줄기 때문에 오직 두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해 '저의 죄를 사해 주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기도만 드렸다.
또한 상담센터를 경기도로 이전하고
작년 12.15일 이후로 보험료만 나가니 언젠가는 살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교도소에 있다고 생각하자 다짐했었다. 카드로 세금을 내면서 시간을 벌어 갚으면 되는 거니까 하고 죽은 목숨처럼 살아내자 마음먹었다. 가는 세월이 억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노동으로 갚을 수 있으니 감사하기도 하였다.
오로지 건강하자! 이겨내자! 하며 버티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죽을 수도 없고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야지... 하고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고, 때론 격려해 주기도 하면서 내가 일하던 상담센터와 내 책상이 그립다.
#노숙자 #임대사업자 #세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