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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팔이에서 청소부로

결국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신문팔이를 처음부터 하고자 한 일은 아니었다. 친구가 이미 신문 팔이를 하고 있었고, 형광옷을 입고 학원에 와서 물었다. '이거 나도 하고 싶은데 조건이 어떻게 돼?' '조건 같은 거 없어, 사장님한테 너 한다고 할게, 언제부터 할 거야?' '당장!' '알겠어, 바로 연락해볼게. 내일부터 나오레!'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건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오후에 지정받은 거리로 나아가서, 배달 온 신문을 팔고 싶은 만큼 팔면 되는 일이었다. 


 1유로 20센트가 신문 한 장의 가격이었다. 신문 가판에서 사거나, 편의점에서 사거나 길에서 신문팔이에게 사거나 가격은 같았다. 그래서 굳이 차 타고 가던 사람들이 편의점에 들를 필요 없이, 신호등 앞에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사는  식이었다. 판매금액에서 커미션은 50%를 내가 받고, 팔고 남은 신문과 남은 50%를 사장에게 전달하면 하루의 신문 판매가 끝났다. 하루 벌어서 하루 살 수 있는 방법이어서 크게 매력적이었다. 

 



 보통 더블린 시내에서 판매하는 동료들이 판매하는 부수는 반나절에 20부였다. 왠지 모르게 나는 30부를 신청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보통의 각오로는  살아 남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장에 학원을 다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밥 조차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시에 왕복 비행기 표를 환불하고 방 값을 냈다. 이제 한 달은 더 버틸 수 있었다. 


 일주일 먼저 일 한 친구가 가르쳐 준 팁은, 쉬지 않고 걷고, 최대한 친절하게 상대하면 잔돈 정도는 팁으로 받고, 그날 배정받는 거리에 따라서 수익이 크게 달라진다 했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했다. '더 재밌게 팔면 신기해서 라도 많이 사지 않을까? 나는 동양인이니까!' 그래서 30부를 받자마자 양손에 신문을 들고 신호등 앞에서 춤을 췄다.  춤이라기보다는 사실 어떠한 '흔듦'에 가까웠다. 관광버스 춤도 아니었고, 클럽춤도 아니었다. 그냥 추고 싶은 만큼, 추고 싶은 방식으로 췄다. 


 그렇게 두 시간만에 29장을 팔고, 집으로 왔다. 마지막 한 장을 팔기에는  사실 좀 무서웠다. 내가 배정받은 자리는 더블린에서 위험하다고 알려진 Summer hill 지역으로, 유학원들에서 가지 말라는 곳 이었다. 동유럽게 히피들이 많고, 주변이 지저분한 것 빼고는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았다. 처음 온 곳이었고, 너무 많이 들어서 지레 겁만 잔뜩 먹었었다. 사실 그랬다. 거리에 차들이 한산해지자 무서워졌고, 60센트를 더 벌고자 무서움을 감수 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집에 왔다. 


 알고 보니 더블린 13개 거리에서 그 날 오후에는 내가 제일 많이 팔았단다. 그렇게  나는  첫날부터 인정을 받았고, 10센트의 수수료를 더 받고 계속 일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10센트 누구에게는 떨어져도 줍지 않는 돈이지만 나에게는 너무 컸다. '이건 내게 큰 영광이다'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신문팔이와 영어공부를 병행하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직업소개소도 다니고, 다른 큰 대기업에도 CV라는 이력서를 계속 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무급이거나 장기 거주 비자가 없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허허 구글 입사라는 생각은 어쩌면 내 망상이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지원서도 써보지 않았고, 제대로 서류 같은 것도 한국에서 가져오지 않았으니 할 말은 없다만 '동양계 유학생 신문팔이'에게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지만 현실의 벽은 두껍웠고 또 높았다.

 

 그런 허세는 이제 접어 두고, 큰 가방에 아래위로 작업복을 넣고, 학원을 마치고서는 혹은 학원을 안 가고 신문을 팔러 나섰다. 항상 같은 지역. Summer hill. 나를 왜 여기로 배정했나? 하는 불만 같은 건 없었다. 멀기도 했지만 위험해서 기피했다고 한다. 오히려 더 좋았다. 어쩌면 더 내 이야기에 조미료가 되어 줄 것 같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자랑도 하고 싶었다. 나는 아일랜드에 와서 신문팔이까지 한다. 그리고 잘 팔고 있다. 뭐 이런 이야기가 당시에는 하고 싶었다. 어쩌면 어긋난 허세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라면 쪽팔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내가  대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래위로 헤럴드라고 적힌 주황 작업복을 입고 춤을 추었다. 


 초심자의 운이었을까? 반나절에 30부를 파는 날은 거의 없었다. 보통 20부 내외로 팔았다. 그래도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자고 다짐했다. 그런 다짐을 하고 바로 다음날 폭풍이 왔다. 바람이 문제가 아니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신문 자체를 꺼낼 수 없었고, 그런 날에 차를 세워서 창문을 여는 운전자도 없었다. 결국 한 부도 못 팔았다. 나는 그래도 웃었다. '나는 그래도 내 다짐은 지켰으니까' 웃을 자격이 있었다.


 하루 일하고 동전으로 10~20유로 정도를 벌었다. 방 값 정도와 간식거리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 딱 생존만 가능 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단골 손님이 늘어가고, 엄지를 치켜세워주며 가는 손님들이 있었고, 손을 흔들어 주는 손님들이 있어서 나름 기분이 좋았다. 가끔 팁으로 잔돈을 일부러 받지 않는 손님들이 많은 날에는 더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항상 좋은 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신문을 배달해 주러 오는 아프리카 형은 지각 하기 일 수였고, 나는 하루 4시간씩 꼬박 신호등 앞에 있으니 코가 시커메 지도록 매연을 마셨다. 그리고 내 만성 비염은 더 심해졌다. 가끔은 술 먹은 양아치 인지, 마약 한 양아치 인지 모를 동생? 들이 와서 내 신문을 가지고 도망가기도 했다. 쫓아가서 잡으니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돌려줘서 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고, 아일랜드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초밥쉐프 구인 광고를 보았다.  나는 돈이 필요했고, 일자리가 필요했다. 칼이라고는 군용 대검 잡아본 게 전부였지만 지원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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