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마지막 날이었다. 어제도 진짜 마지막이었지만, 오늘도 진짜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언젠가 돌아올지도.
지하철을 타고 새하얀 백화점을 지나 새카만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날은 맑았고, 더웠다. 나는 민트색 상의와 베이지색 치마를 입고 벨트를 했다. 커피색 스타킹을 신고 긴 머리를 머리망에 구겨 넣었다. 모자를 쓰고 망사 장갑을 끼고 새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모습이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J와 같은 시간에 배정된 것이 다행이었다. J와 일한 것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짧은 시간이었지만 J와 있을 때 가장 편했다. 자신의 슬픔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정이 많은 아이라는 것도 좋았다. 나의 삶과 내 주변의 삶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J였지만 그래도 J가 좋았다. J가 함께 가달라고 해서 J를 따라 흡연실에 한참을 앉아 폐에 담배연기를 가득 채웠었지만 그것도 다른 곳에서는 해볼 수 없는 경험이어서 좋았다. 그런 J와도 이별이었다.
H가 전날 나를 본체만체했던 게 생각나서 그 아이에게 카톡을 했다. 왜 그래, 이제 누나 싫어? 그 아이는 자기가 그렇게 하면 내가 관심을 더 가져줄 것 같아서 그렇게 행동을 했다고 했다. 아, 정말 귀엽다. H와는 다른 시간대였던가 같은 시간대였던가,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백지에서 그 아이가 날 향해 적극적인 애정표현을 했던 게 생각이 난다. 귀여운 아이였다. 아직도 페이스북 친구가 되어있는 그 아이의 타임라인에는 거친 말들이 올라오곤 한다. 내가 아는 게 전부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친구를 끊어버릴까 하다가도, 그때의 그 아이의 풋풋했던 미소, 말갛던 행동이 떠올라 멈추곤 한다. 내가 아는 그 아이는 시골 소년 같은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한 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어쩌면 자신도 모를 그런 순수한 모습을. 시간이 더 흐르면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낼지 궁금하다. 그 아이는 이미 나를 잊었겠지.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 아이가 내가 떠나온 뒤에도 내가 좋다고 연락이 오면 어떡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고 같은 나이어서 친했던 I도 전날 퇴사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I도 출근해있었다. 너나 나나 똑같다. 우리는 웃으며 손 흔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마지막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일과였고 어느 주말과 비슷한 주말이었다. 나는 한 시간을 일하고 한 시간을 쉬었다. 여전히 구두를 신은 발은 아팠고 목은 탔다. 많은 이들을 주차장으로 안내했고 막힌 주차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고 휴식 시간에는 휴게실로 얼른 내려가서 쉬기 바빴다. 두 번째 마지막은 그래도 첫 번째 마지막보다는 좋았다. 그건 J와 함께여서였을까. 아니면 H가 엄청 나를 좋아해 줘서였을까.
J와 함께 퇴근해서 J와 함께 귀걸이를 고르다가 하나를 선물해줬다. 내 것으로 산 것은 얼마 끼지도 못하고 큐빅이 빠져버렸다. J는 여전히 그 귀걸이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방구석 저 어딘가에, 혹은 쓰레기장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까. 가끔, J가 생각난다. 하지만 나는 J에게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다. J도 가끔 나를 생각할까?
H에게는 일을 그만둔 후 몇 번의 연락이 왔지만 언젠가 연락이 끊겼다. 이후에 I와는 한번 만났지만,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해버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시간이 지나고, 이미 희극이 되어버렸지만, 그때에는 진한 비극들의 연속인 날도 있었다. 이제는 잘 생각나지 않는 스토리들과 말들에 의해 상처받고 짜증내고 화나던 날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 버렸다. 망각이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그 말이 얼마나 맞는 말인지. 모든 것은 잊히고 사라진다. 그 순간에는 가장 중요하고 소중했던 것들이 모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1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 아무와도 나는 연락하지 않는다. 그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고,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으며 떠들던 친구들 중 아무도 그곳에 남아있지 않다. 내 인생에서 아주 짧은 기간인 두 달이었지만, 강렬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때의 나는 없고, 그때의 나를 기억해주는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 14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