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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a Mar 21. 2020

아가, 네가 딸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미래의 내 딸이 나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기를.

 "여보, 만약 우리 아이가 딸이었다면 난 더 공부 잘하고 똑똑하길 바랐을 것 같아."
 아이가 아들인 것을 알게 된 후 어느 날,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자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곰곰이 생각하다 답을 찾았다.
 나는 미래의 내 딸이 나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은 착하고 배려 깊었으면 좋겠지만, 딸이라면 착하기보다는 똑똑하고 똑부러지고 자기 생각이 확고했으면 좋겠다. 평생을 '착하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던 나는 그 평가가 내내 불만이었다. 똑똑하고 똑부러져야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 같다.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공부를 잘함으로써 선택의 기회가 많아진다. 나는 공부를 못했고, 그 결과 선택의 폭이 무척 좁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선택지는 출산, 육아휴직 6개월 뒤 복직이나 퇴사 후 경력단절, 단 두 가지다. 내가 스펙이 좋았거나 연봉이 더 많았다면 선택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내 딸이 출산을 할 때는 이런 고민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 딸은 똑똑하길 바랐다. 이기적인 소망일까.


 어느 임산부의 블로그를 보다가, 그녀가 출산휴가 3개월 후 복직 예정이라는 글을 봤다. 나는 출산, 육아휴가가 6개월이라서 퇴사할지 고민인데 어떻게 할 예정이냐는 질문을 달았고, 그녀는 친정 부모님이 돌봐주실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임신, 육아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 좋겠습니다! 응원할게요!- 그리고 얼마 뒤 그녀의 블로그에는 그녀가 엄청난 고학력자임을 암시하는 글이 올라왔고, 난 무척 민망했다.
 이 이야기를 부장님과 남편에게 했는데, 부장님은 크게 웃었고 남편은 왜 민망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왜 민망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임신, 육아의 이유로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이미 선택지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녀는 서울대 출신이니까, 그녀에게 앞으로 고소득자의 길은 보장되어있으니까, 그녀는 능력이 뛰어나니까. 지방대 출신의 중소기업에 다니는 나와는 다르다.


 "나는 미래에 손주를 봐줄 생각은 없는데, 내 딸이 서울대 출신이면 당연히 아이를 봐줄 것 같아."
 이런 이상한 말을 하고 나서 깨달았다. 내게 '고스펙자가 육아만 하는 것은 능력을 썩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고스펙자가 아니기에 육아만 전담하는 일이 전혀 아까운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도.


 아이가 딸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아이가, 특히나 첫째가 딸이었다면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내 부족한 점을 투영해 아이가 뛰어나기를 바라며 아이를 힘들게 했을 것 같다. 이런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아들은 어떻게든 자기 살길을 찾아 살겠지.'라고 생각하는 반면 '딸이라면 남편의 능력에 기대어 살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


 어느 날은 일을 계속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날은 내 적은 월급과 아이 돌봄 비용, 내 사회생활로 지출되는 비용, 일과 육아를 하며 악화될 건강 등을 비교하면 일을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일을 그만두면 나는 다시는 9시 출근 6시 퇴근하는 사무직 일자리를 갖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평생을 남편의 경제력에 기대어 사는 게 맞는 일일까 고민이 된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영유아 시절을 오롯이 느끼고 살을 부비며 살고 싶기도 하다. 아이가 돌이 되기 전부터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맞는가 싶기도 하고, 엄마의 손길이 필요할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시간을 위해 내 40~60대의 기대소득과 일자리를 포기하는 게 맞는 것일까 고민이 된다. 어느 날 즐겁게 일을 하는 나를 보면서 세상에 불필요한 인간이 된 것 같던 결혼 후 백수 시절이 떠올라 섬뜩하다. 코로나 19로 개학이 연기되어 맞벌이 부부가 고생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이 내 아이가 전염병에 걸렸을 때의 모습이라 생각이 들며 앞이 캄캄하다.


 출산까지 5개월이 남았고, 여전히 나는 워킹맘과 전업맘 사이에서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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