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옭아매었던 실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
나는 내가 진보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보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걸 깨달은 한가지 사건은 이랬다. 어느 순간 짧은 바지를 입는 게 어색해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기 엄마는 짧은 바지를 입으면 안 돼
봄이 오자 아파트 단지를 매일 산책하기 시작했다. 여름이 점점 다가올수록 내 옷차림도 점점 짧아졌다. 긴 팔 긴바지에서 반팔 긴바지로, 원피스로. 짧은 반바지는 잘 입어지지 않았다. 반바지를 입으니 너무 민망해서 다시 갈아입기를 여러 차례였다.
이상하게도 결혼과 동시에 짧은 바지를 입는 게 민망해졌다. 짧은 치마는 입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혼하고서는 무릎 언저리였던 치마 길이가, 아기를 낳고서는 무릎 아래에서 발목 근처로 길어졌다. 집에서도, 외출할 때도 긴 옷이 편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아기 엄마는 짧은 바지 입으면 좀 별로잖아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엄마들이 짧은 바지를 입은 걸 보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짧은 바지를 입는 게 어색하고 민망했다. 남편은 내가 보수적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내 짧은 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의 민폐도 아닌데 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왠지 짧은 바지를 입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햇볕이 뜨거웠던 날, 나는 긴 바지를 잡으려다 그 옆의 짧은 바지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용기를 내어 그것을 들었다. 짧은 바지를 입는 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다니. 나는 그만큼 낡아버렸는지도 모른다. 간만에 입은 짧은 바지는 무언가 낯선 자유를 느끼게 했다. 모유 수유를 끝낸 뒤 처음 마셨던 맥주 한 모금의, 출산 후 처음으로 러닝을 하던 그 날의, 낯선 자유와 해방을. 나는 아기를 유모차에 앉히고 어색하게 집 밖으로 나섰다. 갑갑했던 다리가 시원했다. 아무도 나를 눈치 주거나 이상하게 보질 않았다.
아기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그 후로 나는 핫팬츠를 입고 산책을 다닌다.
나를 옭아매었던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은 무엇이었을까? 사회의 규범도, 통념도 아닌 보수적인 나의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출산 후 짧은 바지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이 나를 옭아매었다. '아기 엄마는 그러면 안 돼.' '유부녀는 그러면 안 되지.'라는 생각들이 나를 감쌌다. 네일을 하고 싶은데 왠지 눈치가 보이고, 처녀 때에 입던 옷이 너무 과감해 보이고, 아기 엄마라면 이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 엄마이기 전에 나로 살기로 다짐하고 결심했음에도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아기 엄마의 미덕 같은 건 집어치워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로 살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