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엔 그저 수많은 무명의 아티스트 중 한 명이었던 나. 한때는 화장품 회사 소속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이미 타업종에서 경력이 너무 오래 쌓여버린 나에게 새로 시작하는 기회가 저절로 오진 않았다. 지금까지 해온 것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을 기꺼이 감수하고 용기 있게 도전하겠노라고 지원서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연락이 온 곳은 거의 없었다.
그때마다 나의 시작이 너무 늦었던 것일까, 때를 놓쳐버린 걸까 라는 생각에 주눅이 들기도 했었다. 아니면 내 실력이 아직 너무 부족한 걸까 의심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이 있었고, 특히 뷰티 쪽은 유튜버나 코덕 인플루언서들이 시장에 이미 넘치도록 많았다. 젊은 감각과 트렌드를 중요하는 업계여서일까, 거의 대부분이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일찍 시작한 친구들이어서 이미 사회생활 경력이 어느 정도 있고, 아이 엄마가 된 나와는 다르게 항상 생기발랄하고 에너지 레벨도 달랐다.
이대로 혼자만의 취미생활로 끝낼 수도 있었다. 그냥 내 얼굴에 하는 스킬 업그레이드 용으로만 만족할 수도 있었지만, 이왕 배운 것을 직접 마켓에서 활용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또 다른 거절 메일을 받은 후 풀이 죽는 대신, 혼자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싶은 걸까. 꼭 업종을 변경해야지만 진정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니 아니었다. 화장품 회사 소속이 아니어도 메이크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았다.
남들과 똑같은 스타일 말고, 나다움을 담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졸업 때 작업했던 것처럼 전문 모델이나 전문 사진사를 고용해서 컨셉을 잡고 특정한 틀에 맞게 찍는 인위적인 느낌 말고, 주위에서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얼굴부터 먼저 시도해보았다. 일반인이 메이크업을 하는 경우는 보통 결혼식에서 하는 신부화장인 경우가 많은데, 그 외에도 면접, 생일날, 파티, 특별한 데이트와 같은 소소한 일상의 나날들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을 때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고 싶을 때 돋보이게 도와줄 수 있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복장을 보통 검은색으로 입는다. 메이크업을 받는 고객을 주인공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라는 이유이다. 화려한 무대 위는 주인공의 장소이고, 우리는 백스테이지에서 그분들이 더 빛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역할을 한다.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연예인, 모델과 같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우리 주위에도 평범하지만 충분히 소소한 일상 속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나의 포트폴리오에는 전문 모델 대신,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차곡차곡 담아졌다. 함께 졸업한 동기들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전문 모델이 화보 촬영에서 찍는 화질 좋아 보이는 사진들 느낌이 프로페셔널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아마추어같이 투박한 핸드폰 사진이더라도,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꾸준히 나의 작품들을 쌓아갔다.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나의 브랜드를 시장에 알릴 수 있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흥미로운 기회들도 찾아오게 되었다. 경력단절이 된 여성들을 위한 면접 메이크업, 항암치료에 성공한 여성들을 위한 특별 기념 파티에서의 메이크업, 고생한 엄마들을 위한 마더스 데이 메이크업과 같은 의미 있는 행사들에 참여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로서 타인에게 도움이 될 때의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속도로도, 나만의 기회들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때는 포기하지 말고, 나만의 브랜드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꼭 어느 곳에 소속할 곳을 찾기보다는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나만의 특별한 스타일을 찾는다면 언젠가는 기회는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