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아카데미에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공지 게시판에 슈에무라 메이크업 대회 참석자를 모집하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유명 화장품 브랜드인 슈에무라에서 주최하는 메이크업 대회였는데 주제를 정해주고 그 콘셉트에 맞는 예술적인 메이크업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슈에무라는 클렌징 오일이 유명하고, 눈썹을 그리는 하드 포뮬러 펜슬이 특히 좋다고 소문난 브랜드였다.
평소에 내가 선호하고 지향하는 내추럴 화장과는 전혀 다른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파격적인 패션 메이크업이 콘셉트이었던 터라 과연 해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우승자에게 주는 특전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상금과 함께 싱가포르 유명 패션잡지에 본인이 한 메이크업이 표지모델로 나올 수 있다는 것, 초보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동기부여가 되기 충분한 혜택이었다.
이번 해의 주제는 Sense of Tokyo, 도쿄의 감성을 메이크업으로써 표현해보는 것이었다.
당시 Shu Uemura 메이크업 대회 홍보 포스터
작년에 우승 아티스트가 바로 우리 아카데미 출신 선배였기 때문에 원장님은 우리에게도 올해 꼭 도전해보라고 하셨다. 그 선배는 작년에 슈에무라 대회를 우승하고 현재는 잡지사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창 배우고 있는 학생이었던 우리들은 그 선배가 너무나 멋진 롤모델 같았다. 내친김에 원장님의 추천으로 그 선배는 우리에게 대회 지원 관련해서 특강까지 해주셨다. 선배가 강조했던 점은 바로 상식을 깨는, 기발한 아이디어의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도쿄 하면 떠오르는 게 뭐가 있지 고민이 되었다. 일본 여행은 가본 지 오래되어서 기억도 잘 안 났고, 더군다나 기발한,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디자인이라는 점이 어렵게 느껴졌다. 일본의 히라가나 글자를 얼굴에 그려볼까라고 고민하다가 그려보기도 했는데 이건 메이크업이 아니라 문신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창의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가 보다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도전도 안 해보고 바로 포기해버리기엔 아까웠다. 그러다 등록 마감일은 슬슬 다가왔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아무래도 얼굴에 표현하는 것이다 보니 기발함보다는 우선 색감이 예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도쿄 하면 제일 흔하게 떠오르는 봄의 벚꽃을 표현해보기로 했다.
색감과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샘플지
그렇게 급하게 내버린 나의 메이크업 스타일은 역시 예상대로 파격적이라기보다는 내추럴했고, 과감하기보다는 안정적이고 무난했던지라 아쉽게도 예선 탈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섭섭하지 않았고 오히려 본선무대가 기대가 되었던 이유는 바로 나랑 반에서 가장 친한 말레이시아 출신 친구 올리비아가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 결승에 진출한 것이었다.
그녀는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에서 사는데 싱가포르에 위치한 아카데미에 올 때마다 국경을 넘는 친구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 반에는 참 열심히 배우는 친구가 많았던 것 같다. 메이크업을 배우기 위해 매일 국경을 넘다니... 말레이시아에서 수업은 이미 들어봤지만 만족스럽지 않아서 싱가포르에서는 좀 더 다른 방식의 메이크업 수업을 기대해서 수고스럽더라도 국경을 넘어 배우러 오는 것이라고 했다.
수업 중 그녀는 항상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선생님이 설명하는걸 비디오로 계속 녹화하고 보고 또 보고, 그리고 수업 끝나고 나서도 남아서 항상 연습하고 가는 완전 열정이 넘치는 친구였다. 본인은 이해도가 떨어져서 이렇게 녹화해서라도 자꾸 봐야 한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 엄청난 열정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나도 덩달아 열심히 하게 되는 고마운 친구였다.
결승 참가자들의 작품
본선 진출자에게는 한 사람당 본선 무대를 보러 오는 게스트를 초대할 수 있는 티켓이 2개로만 제한이 된다고 했다. 그녀는 2개의 초청티켓 중에 하나는 당시 그녀의 남자 친구에게, 그리고 또 하나는 고맙게도 나에게 주면서 꼭 보러 와서 응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덕분에 슈에무라 메이크업 대회를 라이브로 볼 수 있었기에 나에게는 특별하고 감사한 초대였다.
결승 당일에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참가자들의 샘플지를 보니 색감도 화려하면서 기발하고 과감한 디자인이었다. 대부분의 결승 진출자들은 이미 필드에서 경력이 많은 프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누구의 작품보다도 내 친구 올리비아의 작품이 눈에 제일 잘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꼭 우승까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시작된 본선 무대
드디어 시작된 본선 무대에서 6명의 파이널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저마다 본인이 샘플지에 표현한 작품을 실제 모델에게 메이크업을 시연해 보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전부 세련된 느낌의 검은색 옷을 입어서 그런건지 어딘지 모르게 다들 엄청 프로페셔널해 보였다. 그 긴장되는 무대에 올라가 있는 올리비아를 보니 나도 함께 떨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메이크업을 마친 모델들의 패션쇼
올리비아는 다행히도 차분하게 시간 내로 메이크업을 완성했다. 그렇게 메이크업을 마친 모델들은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에서 워킹을 하는데 패션쇼를 보는것 마냥 너무 멋진 무대였다. 비록 올리비아는 최종 우승은 하지 못했고, 이미 패션잡지사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하던 경력이 많은 분이 최종우승을 했다.
그래도 내가 봤을때는 경력이 없이 메이크업 아카데미 학생으로 본선 진출해서 이렇게 큰 무대에서 긴장하지 않고 본인의 작품을 차분하게 선보인 것만으로도 너무 잘 해낸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오늘의 우승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서있는 경력 많은 분일지 모르지만 내가 봤을 때 무대의 주인공은 스포트라이트 뒤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올리비아였다. 이제 막 메이크업의 꿈을 펼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한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대회가 끝난 후, 아쉬워하는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면서 그날 느낀 나의 솔직한 감상을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