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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리어 아티스트 Sep 18. 2021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나요?

지하를 뚫고 내려가는 그 느낌

그분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때때로 나를 찾아오는 손님, 바로 슬럼프다.


회사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일 때문일까, 아니면 추석명절인데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명절 시즌 때마다 유난히 그런 느낌이 찾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요새 싱가포르 자가격리 조치가 14일에서 7일로 줄어들면서 한국을 잠시 방문하는 분들도 꽤 많이 생겼는데, 아무리 7일이라고 한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자가격리하기엔 자신이 없다. 수많은 서류 준비, 검사들, 그리고 하루 확진자 천명 가까이 나오는 현재 싱가포르의 코로나 상황이 불안하기도 하다. 아예 귀국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지친 것일 수도 있고, 남겨지는 느낌은 항상 싱숭생숭하다. 


금요일이고 한주를 마무리하는 퇴근을 했는데도 무기력감은 쉽사리 떨쳐내 지지 않았다. 이메일 더미에서 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일을 하다가 퇴근시간 땡- 하자마자 바로 노트북을 닫아버렸다. 평소 같았음 밀려드는 일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했을 텐데 말이다.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해보려고,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려고 개인 노트북을 켰다가 또 이내 닫아버렸다. 읽는 사람도 별로 없는 안물안궁 일상을 뭐하러 이렇게 쓰나. 아등바등 매일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길래 이번 슬럼프가 좀 세게 왔구나 싶었다. 마치 독감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으슬으슬 몸살기와 두통이 나를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감이 땅 밑을 뚫고 마치 지하 10층 아래로 내려가는 듯한, 무슨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이래 봤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리,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허무함이 질척이듯 소곤댄다. 


일벌이기를 좋아하고 도전하는 것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열심히만 사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부지런하게 살려고 노력하려다가도 때로는 예고 없이 뜬금없는 무기력함에 만사가 귀찮아지고, 의욕을 잃기도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노력만으로만, 계획했던 대로만 인생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감정에 좌지우지될 때도 있고, 루틴을 100프로 달성하는 것도 아니다. 처음엔 이 느낌이 해외생활의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일 벌이기로 인한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점점 그런 건 별로 상관없음을 깨달았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올 때도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슬럼프,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이번엔 어떻게 이분을 맞이해볼까 생각했다. 이럴 때 내가 하는 건 극과 극인데 땀이 미친 듯이 나도록 아무 생각이 안 나도록 뛰거나, 혹은 굳이 무기력함을 떨쳐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실컷 무기력함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계획안에서, 틀 안에서 하는 거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일탈을 해본다. 어젠 다이어트 생각하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맥주와 맛있는 초밥을 혼자서 카운터에 앉아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먹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애썼어.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해라고 스스로를 토닥여본다. 다이어트는 점점 더 멀어져가지만, 그래도 퇴근 후 맥주 한잔은 오늘의 나에겐 보약같은 음식이었다. 


나를 계획안에 가두고 다그치기보다는 최대한 느슨하게 풀어두고 마음 돌보기에 집중해본다. 오랜만에 찾아온 슬럼프는 억지로 떨쳐내려고 하지 말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의욕 없음을 인정하고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슬럼프 손님을 맞이하여 추석 연휴기간에는 문케이크 대신 한국 떡집에서 송편을 배달시켜 나눠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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