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디데이가 왔다. 새해가 되자마자 퇴사를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이라니. 그것도 딱히 불만 없이 만족스럽게 잘 다니고 있는 지금 회사에서 말이다. 매니저랑 1-1 캐치업을 주기적으로 하기도 하고 진행하는 일중에서 이슈가 있으면 항상 미팅 요청을 먼저 하긴 했지만 딱히 어젠다 없이 요청한 건 처음이었다.
사무실에서보단 카페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딱딱하고 형식적으로 사표를 던지고 싶지 않았다. 부정적인 이유로 그만두는 것이 아니어서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 승진까지 이루고 나서 여기서 그냥 중도 포기하고 나가다니,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잔잔한 음악이 깔린 더없이 편안한 분위기과는 너무 대조되는 반전인 퇴사,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를 천천히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시작했다.
매니저님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혹시라도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그 어떤 회의 때 보다도 단어 선정에 신중을 기했다. 이곳이 싫거나 불만이 있어서 따로 다른 곳을 알아본 것이 아니고 우연히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주어져서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 것이라고. 처음엔 두려움이 있었지만 알면 알아갈수록 새로운 산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그래서 이 흐름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향하는 도전이라고 말이다. 그동안 회의를 그렇게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긴장되던지,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데도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나의 떠듬거리는 고백을 듣고 난 이후, 그분은 일단 흥미로운 기회를 마주하게 된 점에 너무 축하한다고 해주셨다. 앞으로 조인하게 될 새로운 곳이 굉장히 흥미롭게 들린다며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셨다. 공룡 같은 산업에서 벗어나 지금 떠오르고 있는 산업으로 옮긴다는 용기도 대단한 것이라고 칭찬해주셨다. 하지만 매니저로서는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데 혹시 월급이 문제인 거면 맞춰줄 수 있고, 롤이 문제인 것이면 부서이동을 서포트해줄 수 있을 텐데 마음을 돌릴 가능성은 없겠냐고 여쭤보셨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월급도 부서문제도 아니라 붙잡기가 어려울것 같아서 아쉽다고. 새로운 분야는 지금보다 훨씬 리스키하고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일 것 같은데 정말 후회하지 않겠냐고. 그리고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수 도 있겠으니 일단 사표를 바로 승인하지 않고, 글로벌 헤드와 미팅을 한 번만 더 해보고 최종 결정을 해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음 날 이어진 글로벌 헤드님과의 미팅 시간.
그동안 헤드님과 미팅룸 대화는 대부분 실적에 대한 이야기였고, 감사하게도 실적이 꽤 괜찮았기 때문에 미팅 분위기는 좋았고 나에게 칭찬을 유난히 많이 해주셨던 분이었다. 이미 매니저님께서 언급해주셔서 상황은 알고 있지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하셨다. 어제 카페에서 이미 한번 연습(?)이 된 터라 조금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그 어떤 이직보다도 어려웠던 결정이었다고, 그리고 솔직히 후회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가기 전부터 수많은 콘텐츠들의 홍수 속에서 이미 그 많은 정보에 순식간에 압도당하는 기분이고, 그리고 이곳에 비해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배우다가 번아웃될지도 모를 것 같다고.
코로나 기간에도 열심히 일해서 전년대비 훨씬 뛰어난 실적을 쌓은 순간도 있었고, 이제는 아시아 지역을 너머 미주와 유럽까지 맡겨주신 기회에도 너무 감사하다고. 최근에 승진이라는 성취도 이룰 수 있어서 뿌듯했고 나의 노력을 인정해주는 곳이라 보람 있었다고. 무엇보다 팀의 모든 사람들이 배울 점이 많고 좋은 사람들이라 오래오래 함께 일하고 싶었다고. 참 좋은 회사였기에 익숙하고 정든 이곳을 떠난다는 결정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잡기 더욱 힘들 것 같아서 용기를 내고 싶다고.
헤드님은 조용히 나의 말을 들으시더니, 아마 같은 업종의 경쟁사로 이직한다고 했다면 말렸을 텐데, 새로운 분야로 향하는 도전이고, 편안한 comfort zone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또다시 새로운 길을 향해 선택한 결정이 분명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용기 있는 결정이라고 너무 축하하고 응원하고, 언제라도 돌아올 마음이 있다면 연락해달라고, 항상 우리는 이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고 언제든지 반겨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팀에서 인재를 놓치게 돼서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너의 미래를 위한 결정을 존중한다고 격려해주셨다.
그 순간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마음속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게 무슨 청승이지 지금 상항에서 눈물이 나오면 안 되는데, 회사에서 프로페셔널 답지 않게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눈물이란 회사에서 스트레스받을 때 화장실에서 혼자서 몰래 훔치고 나오는 건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책맞게도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의 진심이 전달된 것 같은 안도감,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인정, 그리고 전혀 불만이 없음에도 이별을 결정한 아쉬움이 섞여있는 듯 했다. 헤드님은 괜찮을거라고 다독이시면서 넌 충분히 잘 해낼 거라고, 여기서 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잘될거라고 격려해주셨다. 다른 곳에 가더라도 꼭 주기적으로 연락하자고, 퇴근 후 맥주 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 놀러 오라고, 굉장히 흥미로운 분야라서 어떻게 성장하게 될지 궁금하고, 앞으로 많이 가르쳐달라고 해주셨다.
새로운 길의 선택이 과연 현명한 결정인지 여부는 솔직히 아직 모르겠다. 사직서를 내는 순간에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100% 걷어냈다고 확신하기 힘들었다. 사직서를 낼때면 후련한 마음이 더 컸는데 눈물이 나오다니 굉장히 이상한 순간이었다. 퇴사의 순간마저 감동을 주던, 전혀 불만이 없었던 직장을 내 발로 뛰쳐나가려는 지금의 순간이 훗날 돌이켜봤을 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물음표가 투성인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미래의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분야의 호기심이 섞여있는 와중에,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으니, 일단 도전해보라고 해주신 격려와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 수많은 기회들을 주고, 배울 점이 많았던 너무나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던 이곳에 사직서를 내고 오히려 더욱 떠나기 아쉬워진 점이 아이러니지만, 남은 노티스 기간 동안에도 최선을 다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 앞으로 팀원들에게도 슬슬 이야기를 해야할텐데 그때는 부디 눈물이 나질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