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해야 성공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니, 내가 진짜 좋아하는 물건 중에 골라야할 것 같았다. 방 안을 둘러보니 화장대 위에 수북히 쌓이다 못해 양 옆 서랍장까지 점령한 화장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있는 화장품들만으로도 리뷰 영상을 찍고 코덕 인플루언서가 먼저 되어보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인플루언서가 되고 난 후 자연스럽게 화장품을 판매하면 될것 같았다. 당시 화장품을 큐레이션해서 판매하는 인스타그래머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카메라를 켜보고 화장품을 발라 보았다. 모델한테 메이크업을 해주는것은 익숙했지만, 내 얼굴에 직접 화장품을 바르면서 구독해주세요라는 멘트를 날리며 인플루언서 흉내내는 것이 매우 오글거렸다. 우리 딸래미가 수시로 날리는 멘트 "구독 좋아요 눌러주세요"를 카메라에 담고 나면 흐뭇하고 귀엽던데, 스스로의 얼굴을 영상을 보니 너무나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카메라를 부실뻔했다-_- 인플루언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화장품 스타트업과 함께 콜라보레이션 (협업)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곳은 싱가포르 스타트업이었는데 당시 한창 미국에서 붐이 시작되던 구독 서비스 개념의 화장품을 싱가포르 마켓을 타깃으로 런칭을 준비한다고 했다. 매달 다양한 색상의 색조화장을 예쁜 선물상자에 담아 고객에게 배달 서비스를 한다는 마케팅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이제까지 항상 대기업에서만 일해보던 나에게 스타트업은 사실 MBA 시절 케이스 스터디로 접해보던 신세계였다. 이미 경력이 10년 이상 되어버린 내가 스타트업에 조인한다는 건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화장품 회사 인턴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인턴을 하기엔 타 업종 경력이 이미 길어서 부담스러운지 계속 탈락만 하던 중이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경력 덕분에 비록 정식으로 조인하는 것 아니었지만, 젊고 다이내믹하다는 스타트업 문화를 접해볼 기회,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화장품 사업을 접할수 있다니, 일과 공부와 육아를 하느라 하루에도 시간이 너무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소중한 기회인것 같아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직접 화장품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좋은 경험이 될것 같았다. OEM을 한국에 위치한 공장에서 했던 터라, 정체성은 싱가포르 국내 화장품 기업이지만 한국식 화장으로 브랜드 컨셉을 갖고 싶어서 한국인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찾고 있다고 하셨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뿐만 아니라 브랜드를 대표하고 홍보할수 있는 앰배서더라는 역할까지 할만한 아티스트를 찾고 있었는데 MBA출신 회사원이면서 한국인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특이한 경력의 나를 알게되어 반갑다고 하셨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듣기만해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메이크업 앰배서더로서 해야 할 일들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꼭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MBA 졸업한 학생으로서도 비지니스 수업 때 들어만 보던 케이스 스터디가 아니라 실제 경험하는 성공적인 케이스로 만드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스타트업 대표님은 두 여성분들이었다. 한분은 말레이시아 출신 여자분으로 영국 명문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면서 미국 명문 MBA 출신에 유명 컨설팅 펌에서 컨설턴트로 일하셨던 이력까지 스펙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분이셨다. 아이가 셋이 있는 워킹맘이면서도 동안 미모의 소유자였는데, 왠지 다 가진 여자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거 같은 분이셨다. 함께 동업하시는 분은 글로벌 소비재 회사 GM 출신의 필리핀 여성분이셨는데 두 분 모두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화려한 커리어 백그라운드를 가지신 분들이었다.
브랜드 앰배서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하는 일은 바로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직접 고객에게 테스팅 해 보이는 일, 그리고 런칭 파티 프레스 컨퍼런스 때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써 모델에 시연하는 것, 잡지 촬영 때 한국 스타일 메이크업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콘텐츠를 제작할 때, 직접 출연하는 것이었다. 또한 주력 아이템이 립스틱이었는데, 브랜드 앰배서더로서 립스틱을 바른 본인 사진을 패키지 형태로 오프라인 쇼핑몰에도 런칭할 것이라고 했다.
화장품이 정식으로 쇼핑몰에 출고되었을 때 그중 제일 신기했던 경험은 바로 쇼핑몰 화장품 코너의 매장 선반에서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싱가포르의 명동이나 비슷한 쇼핑거리 오차드의 한 백화점에 위치한 매대에서 화장품과 공식 메이크업 아티스트라고 나온 나의 사진이 보였을 때 마치 유명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대형 화장품 기업의 유명한 연예인 처럼 대문짝만하게 나온 사진도 아니었고, 작고 아담한 코너였지만 그래도 평범한 일반인인 나로선 엄청 신선한 경험이었다.
백화점에서 VIP 고객들 대상으로 한 메이크업 시연회에서도 싱가포르 고객들에게 한국스타일의 메이크업을 선보일 수 있어서 한국인으로서도 뿌듯했고, 한국식의 자연스러운 화장이 마음에 든다고 만족해하시는 모델분들의 피드백을 들을 때면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의 보람도 느껴졌다. 또한 사업이란 것이 쉽고 간단한게 아니구나란 생각도 이번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화장품 브랜드 런칭 이후에도 대학원에서 들었던 마케팅 수업에서 배운점을 떠올려 보며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을지 나름대로 기획안을 써보고 대표님들과 의논해볼수 있어서 좋았다. 이론으로만 알고 가상의 케이스 스터디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적용해보는 살아있는 MBA 수업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가 직접했던 사업이 아니었고, 작은 스타트업에 도움을 주는 브랜드 앰배서더,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의 경험이었지만 그동안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지내던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움에 감사한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