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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리어 아티스트 Mar 25. 2022

수면바지를 입은 것처럼

망하고 나서 느낀 자유로움

나는 수면바지를 좋아한다. 


여름나라인 싱가포르에서는 더워서 입기가 어렵지만 겨울에 한국에 가면 나는 꼭 수면바지를 챙겨 입는다. 몽실몽실한 감촉이 마치 구름을 휘감아 입은 듯 편안하다. 긴장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는 편안한 마성의 수면바지- 화려한 색감의 곰돌이들이 그려진 촌스럽기 그지없는 수면바지지만, 입자마자 폭 안기는 것 같은 포근하고 폭신한 느낌에 중독된다. 엄마는 오래된 옷이니까 이제 그만 버리라고 하셨지만 소중히 옷장 안에 넣어두고 추운 겨울에 한국 갈 때마다 집안에서 마치 교복처럼 입게 된다. 


오늘도 미팅 때 발표하는 날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이후, 발표할 일이 많아져서 또 몇 시간 전부터 긴장을 하고 있었다. 스크립트를 전부 타이핑을 하려고 했는데 많은 회의들을 커버하느라 결국 시간이 부족해져 버렸다. 쓰다 만 것을 읽다가 또 헤매서 머릿속이 하얘질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식은땀이 나고 손발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키워드만 대충 적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부딪혀보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준비를 잘 못해서 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려놓고 나니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반 포기상태로 덤덤하게 내가 아는 만큼만 말하자고 결심하고 나니 머릿속이 정리되면서 술술 말이 나왔다. 마치 집에서 수면바지를 입은 것 같은 편안함에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억지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려고 하니까 부담스럽지 않아서 그랬나 보다. 타이트한 펜슬 스커트를 입고 숨 막힐 듯 긴장해야 프로페셔널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겨울에 수면바지를 입고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서 쌩얼로 방 안에서 주절주절 수다 떠는 느낌이랄까?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힘을 줘서 쓰려고 하니까 목과 어깨가 뻣뻣해지면서 절대 안 써지던 글이 그냥 지금의 느낌을 담아내는 것에만, 부담 없이 흘려보내자고 마음먹었을 때야 비로소 타이핑이 시작된다.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을 쓰지도 않고, 전문가가 아니면 뭐 어떤가. 중요한 건 글을 쓰는 내 모습이 좋다는 것이다. 파워블로거나 인플루언서가 아니더라도 내 글을 읽어주는 소수 몇 명의 독자가 있어도 참 행복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내 마음을 글로서 표현하는 것이 좋다면 그로서 충분한 것 같다. 


너무 나를 괴롭히지 말고 남에게 잘해주려고 하는 만큼, 나에게도 조금 더 잘해주려고 한다. 모든 일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것도 좋지만, 그전에 억지로 쥐어짜지 말고 스스로를 아껴주는 것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수면바지를 입은 채 몽실몽실한 감촉에 빠져들 듯, 편안함을 통해 자연스러운 모습의 나를 표현하는 연습 중이다. 나를 인정해주고 알아봐 주는 시선을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굳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도 이미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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