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분과 같은 무대에 서던 날
작년 미국 컨퍼런스에 참여했을 때 인상 깊게 들었던 연사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화장품 브랜드에서 메타버스 전략을 총괄하는 분이었는데 여러 웹 3 플랫폼을 브랜드 스토리와 접목하는 과정을 말씀하시던 모습이 마냥 멋지고 대단해 보였다. 그분의 연설이 끝나고 나서도 추가적으로 궁금한 점도 생기고 따로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세션이 끝나고 무대 뒤쪽 연사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이미 그곳엔 연락처를 주고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있었다. 각자 차례대로 명함을 들고 엘리베이터 피칭을 하듯 한 사람당 2-3분 내로 소개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마치 오디션을 하듯 적극적으로 저마다의 회사를 어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영업을 하러 온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간절하게 줄을 서야 할까라는 고민이 잠시 들었지만, 언제 또 그런 멋진 분을 미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꿋꿋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한 나의 소개를 마치기도 전에 그분은 미안하지만 다음 일정 때문에 지금 빨리 이동해야 한다고 자리를 뜨셨다. 워낙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고, 바쁜 스케줄을 갖고 계실 듯해서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미국이 아니면 또 만날 기회가 생기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언젠가 나도 그분처럼 멋진 모습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새로운 산업 분야와 전통 분야를 융합할 때, 나만의 또렷한 시선과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전문성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1년 후.
세상은 좁고, 인생은 예측불허다. 신기하게도 이번 일본 출장에서 다시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연사로서 같은 무대 위에서 말이다. 예전에 미국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엔 마치 아이돌을 우러러보는 팬의 입장이었는데 불과 1년 뒤 그분과 같은 연사의 입장에 설 수 있다니 영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원고가 너덜거릴 때까지 외우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더욱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발표를 마치고 무사히 끝났구나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니 주최 측에서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면서 그분과 함께 서 계셨다.
발표 너무 잘 들었어요, 근데 낯이 익는데 혹시 우리 언제 본 적 있지 않나요?
네 맞아요, 작년 오스틴 행사 무대 아래서 잠깐 뵈었었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그렇게 대화를 이어 가다가 그분과 함께 점심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1년 전 그렇게도 간절하게 대화를 하고 싶었던 분과 다시 만났다니, 그것도 이렇게 1:1로 식사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니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1년전 그 분과 대화했던 1분이, 불과 1년후, 1시간 이상의 대화로 바뀌던 순간이었다. 그 분께서는 브랜드 전략으로서 바라보는 웹 3 세계, 그리고 나는 디지털 이코노미 생태계에 대한 의견을 공유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 업계는 워낙 변화의 속도가 빨라서 매일매일 초보자가 된 것 마냥 리셋된다는 느낌이었다. 방대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항상 새로운 내용들을 습득하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지만, 한편으론 배울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대화 내용에 푹 빠져들었던 점심시간이었다. 우린 조만간 또 만날지도 모를 것 같다고 서로의 연락처를 공유했다. 미국이든, 싱가포르든, 아니면 제3의 장소든 어디서든 다시 만나게 된 날에는 조금 더 성장한 멋진 모습이 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바쁜 스케줄 속에서 조금 버겁더라고 이번 발표를 하겠다고 결심한 몇 달 전, 나 자신에게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은 주제로 발표를 준비하면서 원고와 피피티를 얼마나 뜯어고쳤는지, 종이가 너덜거릴 때까지 수정된 원고를 읽고 또 읽고 달달 외우면서 괜히 무리해서 생고생을 하는 걸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에 이번 발표를 거절했더라면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될 기회도 놓쳐버렸을 테니까.
시장 변동성도 크고 불확실한 매일매일을 살아가지만, 이런 시기를 지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시도해보고자 하는 마음인 것 같다. 덕분에 이렇게 근사한 우연을 선물처럼 마주칠 수도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