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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리어가드너 Apr 26. 2024

우아한 가난의 기억

'다시 또다시 취준생이 되다' 시리즈

가난에 붙는 복리 '이사'     


누군가 말했다. 가난은 부끄러울 정도의 불편한 것뿐이라고. 가난했던 그 기억이 내 자신을 부끄럽고 초라한 모습으로 만든다. 기억 속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가난했다. 매달 단칸방 월세에 전전긍긍하던 삶, 같은 반 친구였던 '옥희네 문칸방 둘째'로 이름대신 불리던 삶, 가난의 후각을 자극하는 변소깐 옆 쥐가 득실 대던 방에서의 삶, 귀신들과 동거동락했던 삶까지. 오감각을 자극하는 가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소환된다.     


가난에 붙는 복리가 '이사'라는 말처럼 수십 번의 이사로 많은 경험을 했다. 서른 살도 되지 않아 마흔 번을 넘게 이사를 다니며 살았으니, 어찌 보면 가난해서 이사가 아닌 이사를 많이 해서 가난하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이 든다. 과거 비구니 스님으로의 삶을 살았다는 홀로 된 주인집에서 밤마다 들리는 정체불명의 비명소리와 다툼소리가 있었다. 이를 못 견디고 삼일 만에 이사를 나왔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집주인이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반지하 셋방살이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했던 그 순간, 아무 일면식도 없는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님의 신고로 위기를 넘겼던 일도 있었다. 노인이 독고사로 죽었다는 집에서는 온 가족이 매일 밤 가위눌림이 심해 일주일 만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었다.          



반쪽짜리 그림자

     

가난 속 나는 또래에 비해 조숙했고 불안이 몸에 밴 아이였으며, 내어 주고 양보하는 게 천성인 아이로 성장되었다. 어느 날 단출한 보따리 짐 하나 머리에 이고, 동생을 업고 목적지 없는 곳으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부모는 자식이 닮고 싶은 거울이자 닮기 싫어하는 그림자와도 같다는 말이 있다. 부모님의 이혼 이후 생활통지표에 가족관계란을 채우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이름을 꾹꾹 눌러쓰고, 낮에는 가정부로 밤에는 노점상에서 일하셨던 어머니의 직업을 자영업으로 둔갑시켜 채워진 날도 있었다. 친구들과 하교 길에 마주친 엄마를 외면했던 불편하고 짜증스러웠던 그 기억은 두고두고 가슴 치며 후회하는 삶을 살게 만들었다     


가난으로 굳은살 박인 삶에서 가난한 마인드는 쉽게 바꿀 수도 바꾸기도 참 힘든 것 같다. '가난은 겨울 옷에서 티가 난다'는 드라마 대사가 있다. 평생 일해 집 한 칸 마련할 수 없는 '이생망'이라는 단어도 있으며, '티끌 모아 티끌'이라는 방송인의 말도 있다. 이처럼 가난은 돈(모을 수도 쓸 수도 없는)이 부족한 우리의 불안과 결핍이다.          



가난은 세월에 새기는 것     


가난한 사람은 누구보다 강력하게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현실에 묶여
있다. (...)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사람으로 살지 고민을 이어갈 시간이 없다. 내가 미래를
고민하다가 써버린 시간에 돈을 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 안온의 [일인칭 가난] 중 -     


가난도 극복이 될까? 역경이 좋아지거나 없어지는 것도 극복이며, 역경을 견디고 살아가는 것도 극복이다. 주위에서 가장 많이 주문받았던 말이 '극복해'였다. '행복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다. 지금 닥친 불운만큼 앞으로는 행운이 찾아올 거라는 위로의 법칙. 그러니 나쁜 일이 생기면 곧 좋은 일이 있을 테니 쉽게 좌절하지 말고 버티라는 격려의 법칙과도 같았다. 머릿속으로 이해되는 단어의 의미 안에는 자신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의 방법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누구나 가난의 경험과 상관없이 살아온 시간만큼의 인생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가난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시간의 기억이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싫었지만 지금도 가난을 벗지 못한 채 그 언저리에 살고 있는 이유도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도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인 이사에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것, 가난을 극복하기보다는 몸에 새겨 그 어떤 날이 무딘 말에도 상처받지 않다는 것, 피할 수 없는 가난이라면 즐겨야 한다는 세상 너른 마음, 가난이라는 한계에 나의 시간을 재단하지 말라는 몸이 기억하는 토닥임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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