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커리어가드너 May 07. 2024

가슴의 달, 가슴은 안다

'다시 또다시 취준생이 되다' 시리즈

                                        어머니 시절보다 / 엄마 시절이 / 더 힘이 있고 
                                       엄마 시절보다 / 어머니 시절이 / 더 둥글더라고
                                           - 목필균의 [엄마와 어머니 사이] 중-     


나는 '엄마' 보다 '어머니'란 호칭이 자연스럽다. 어머니라는 말은 엄마라는 말보다 왠지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가끔 '시어머니'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보통 양육 초기 '엄마'로 부르다가 철이 들면서 '어머니'라고 부른다는데, 철없던 어린 시절(지금도 철은 없다),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걸 꺼려했다. 두세 명 들어가면 꽉 차는 공간의 협소함도 있었겠지만 무서운 존재로서 어머니의 눈빛, 말투, 행동에 상처받던 친구들이 꽤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매를 맞고 자랐던 나도 어머니가 제일 무서웠다.      


"어머니, 잘 못 했어요. 다시는 언니말은 더 안 듣고, 동생은 더 많이 때릴게요."     


일찍이 용서를 구하던 버릇이 자연스럽게 호칭까지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세상 무섭던 어머니에게만 세월이 곱절로 지나간 듯하다. 왜소한 몸집에 증은 굽고, 날카롭던 눈매는 한없이 자상하게 무뎌졌으며, 지팡이를 짚어야 간신히 자리를 옮길 수 있는 할머니가 되었다. 20대 초반까지 나에게도 (외) 할머니가 있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본인을 닮아가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우리 할머니는 비구니 스님의 외동딸로 태어나 고양이들을 벗 삼아 절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그 이후 중매로 만난 할아버지와 17세에 결혼해 슬하에 9남매를 낳아 기르셨더란다.  첫째 맏딸인 우리 어머니 밑으로 한 살 터울로 아들을 낳았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잃었고 상심이 컸다고 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둘째 이모, 셋째 이모, 큰삼촌, 넷째 이모, 다섯째 이모, 여섯째 이모, 그리고 막내 삼촌을 낳으셨고 결국 동네에서 '자식 부자'란 소리는 듣지 못하셨다는데 그 이유는   

   

"그땐 다들 그렇게 많이들 낳고 살았어"라고 말씀하셨다.     


그 시절, 할머니는 자식들을 낳느라 어머니는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더란다. 어머니의 총명함을 눈여겨본 교회 여선교사님이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었다고. 만약 그때 여선교사님을 쫓아갔더라면 모녀관계가 아닌 목사님과 신도관계로 만났을 거라시며 지금까지도 농담반 진단반으로 말씀하신다.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했던 할아버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배곯아가며 고생만 하는 할머니가 불쌍해서 어머니는 꿈을 포기했었다. 그렇게 K-장녀로서의 30년 가까운 수고와 고단한 삶이 시작되었다. 초등학교도 못 마치고 할머니와 노점장사를 시작해서 남의 집 부엌일을 거들다 공장에서 미싱 보조로, 미싱사로, 한복 제작자로 일하며 이모 · 삼촌들의 뒷바라지를 했었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한평생 무릎 관절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전국 곳곳으로 용하다는 침술사를 찾아 침을 맞으러 다니셨다. 한 번은 할머니를 따라 불광동 침술사한테 갔었는데 풍으로 하반신을 못 쓰는 분이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다던데' 하며 그분의 침술을 반신반의했던 기억도 있다. 아무튼 할머니의 무릎은 가정에 무책임했던 할아버지와 8남매의 뒷바라지에 무너져 내린 억장의 무게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병으로 잃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막내아들까지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야 했다. 이혼한 딸, 사별로 홀로 된 딸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딸, 화제로 전신 화상을 입은 딸의 수발까지. 그럼에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다 내 탓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어느 날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어머니와 내가 중환자실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한 마디 말씀을 하신 후, 한 많던 이 세상의 짐을 내려놓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불쌍하고 미안한 존재로 서로를 위로하며 한평생 친구처럼 의지해 왔던 것 같았다.     


"엄마! 미안해요. 내 잘못이에요."

"어멈아, 미안하다. 다 내 탓이다. 다 잘 될 거야."


그동안 '요즘 엄마가 꿈에 자주 보인다'는 말로 소원해진 딸이 보고 싶다는 어머니식 표현에 바쁘다는 핑계로 무관심해왔던 나다. 지난주 가정의 달이자 공식적인 효도의 날(어버이날)을 맞아 어머니를 뵈러 갔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건장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간데없고 예전에 할머니의 모습(몸은 왜소하고, 등은 굽고, 지팡이를 짚고)이 드리워져 보였다. 


"엄마! 미안해요. 내 잘못이에요."라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속상하고 서글펐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 지금의 막힌 길이 언젠가는 선물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게 될까? (...) 
삶이 때로 우리의 계획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다. 머리로는 이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가슴은 안다.
                                                                     -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중 -     


요지는 마음의 허기를 채웠던 할머니의 고봉밥과 '다 잘 될 거야'라는 할머니의 인생 만트라(마법의 주문)도 그립고, 어머니의 매운 손맛도 사무치게 그립다는 거다.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겠다'는 다짐이고 '어머니를 오래 뵙고 싶다'는 부탁이다. 5월은 요물스런 달이다. 그 요망함을 빌어 죄송한 마음을 덜어내고 싶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할머니께 묻고 싶다.      


"할머니, 우리 어머니 잘 되고 계신 거 맞나요? 맞겠죠?" 

매거진의 이전글 "닥치고 운동이나 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